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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n 06. 2021

산부인과에 다닌다는 비밀에 대하여

산부인과의 문턱은 누가 높여놓은 것일까?

 산부인과를 처음 간 것은 내가 스물일곱 살 때였다. 회사 책상에 앉아 반나절을 식은땀만 흘리다 오후 반차를 내고 홍대에 있는 산부인과에 갔다. 매 달 있던 월경통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통증이 심했다. 이 통증의 크기를 계량할 수 있다면 의사에게 내 간절함을 이해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부터 10까지 중에서 어느 정도로 아프냐고 묻는 말도 안 되는 방법 말고 (실제로 병원에서는 아직까지 통증을 이 방식으로 이해한다.) 어떤 특수한 의료기기 같은 것을 내 배에다 대보면 '아랫배의 모든 장기를 갈기갈기 찢고 짓밟은 다음 아래로 끌어내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음. 한 달에 일주일은 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렇게 고통을 느낀 지 십 년이 넘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임' 정도로 표시가 되면 차라리 좋을까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월경이 있을 때마다 참기 힘든 하복부 통증과 허리 통증이 있었지만, 나는 이 통증 때문에 병원을 가야 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친구들 중 대다수도 매달 월경통을 겪었고, 교복을 입고 꾸부정하게 배를 움켜쥔 우리들은 어찌할 바 모르고 책상에 엎드려있기만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책상에 엎드려있는 나에게 친구는 뜨거운 떡볶이와 순대를 포장해 와 건넸다. 떡볶이가 식어도 괜찮으니 우선 배에 얹고 있으면 통증이 조금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중학생에게 이제 막 포장해온 떡볶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피의 연대'이자 참 우정이었다.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지 않기 위해 중년 남성 선생님에게 월경통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우리 중 소수만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참다못해 양호실에 가면 게보린을 받았다. 나는 게보린을 먹고 나면 늘 속이 불편하고 때로는 구토를 하기도 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한참을 떡볶이를 끌어안고 있다 겨우 운동장으로 나가 엉거주춤하게 피구를 했다. 집에 돌아와 배가 아프다고 엄마에게 말하면 엄마도 어릴 때 그랬다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괜찮아졌다고 배를 문질러줄 뿐이었다.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산부인과에 온 나는 아이를 임신한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열심히 검색을 해서 여자 의사가 있는 병원을 찾아왔다. 입구의 접수대에서 나는 성경험 여부가 있냐는 간호사의 질문에 당황하고선, '네'라고 답했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던 의사는 초음파와 질염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검사 의자에 앉아 양다리를 거치대에 올렸다. 처음 취해보는 이 놀라운 자세에 긴장이 더해졌다.

 "성 경험 있어요?" 

 의사가 또 물었다. 

 "네? 네..."

 나는 죄를 지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성경험이 내 월경통의 원인이나 되는 것처럼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갑고 불편할 거예요."

 의사는 막대기 같은 것을 내 몸속에 넣고 움직이면서 한 손으로는 컴퓨터를 만졌다. 모니터에 다섯 장쯤 흑백사진이 찍혔다. 의자에서 내려와 옷을 입고 책상에 마주 앉았다. 

 "자궁근종이 크네요. 거대 근종이에요. 크기가 너무 커서 어렵겠네요."

 무표정한 의사는 모니터를 쳐다보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별일을 얘기했다. 눈을 껌뻑껌뻑하며 의사가 하는 말을 듣다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가를 촉촉이 적시는 눈물이 아니었다. 앉아있기 어려울 정도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눈물과 콧물이 터져 나오는 나에게 의사는 휴지를 한 장 뽑아 건네며 말했다. 

 "울 일 아니에요. 요즘은 20, 30대도 다 있는 병이에요. 죽는 병 아니에요. 수술 생각 있으면 큰 병원 가세요."

 표정이 없는 의사는 대기 환자가 많으니 어서 나가라고 종용하듯 말을 내뱉었다. 나는 휴지를 한 움큼 뽑아 병실에서 나왔다. 타이트한 H라인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홍대에서 집까지 걸었다. 발 뒤꿈치가 다 까져 아픈지도 모르고 걷는 내내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왜 눈물이 났는지도 잊어버린 채 그냥 엉엉 소리 내면서 걸었다. 

 '의사가 어렵다고 했는데... 도대체 뭐가 어렵다는 거지? 수술이? 치료가?' 나는 정작 중요한 다음 치료계획을 듣지도 못하고 나와버린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첫 산부인과 경험 이후에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제 휴가를 내고 큰 병원에 가야 하나? 큰 병원에 가려면 지난번에 갔던 그 병원에 가서 진료의뢰서를 받아야 하는데... 우선 큰 병원 예약부터 해야 하나? 똑 부러지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병원 가는 것도 어떻게 가야 되는지 모르고 갈팡질팡 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런 일이 있을 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막막했다. 떨어져 산지 오래된 엄마는 내가 감기만 걸렸다고 해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 없던 병이 생기는 사람이었다. 오빠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결국 회사 팀의 리더였던 상무님에게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나는 상무님에게 이 얘기를 하는 내내 또 울어버렸다. 

"어떡하긴. 병원 가야지. 선생님 알아봐 줘?" 

 표정이 없던 의사처럼 상무님도 냉정했다. 병이 있으면 치료를 하면 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일단 병원을 가라고 했다. 

 "산부인과 안 다니는 사람 별로 없어. 다들 난소에 혹 있거나 자궁에 혹 있거나. 아니면 임신이 안돼서 다니거나. 별 거 아니니까 주눅 들지 말고 병원 가."


 대학병원 산부인과에는 임산부의 비율이 의원보다 훨씬 적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그 냉정한 의사와 회사 선배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대학병원까지 다니며 각종 여성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병원을 다니는 동안 행여나 병원 복도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실제로 산부인과 병동에서 병원 정문으로 나가는 길에 회사 선배를 만난 적이 있었다. 무슨 일로 여기 왔냐는 질문에 나는 그냥 잠깐 미팅이 있어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무심코 내뱉은 거짓말에 죄책감을 느꼈다. 


 한참이 지나 나는 친한 친구 몇 명과 후배에게 산부인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됐다. 내 갑작스러운 휴가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이었는데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듣게 됐다. 그들은 내 귀에다 대고 들키면 절대 안 되는 이야기를 하듯 조용히 '아... 저도/제 친구도 자궁에/난소에 혹이 있어서...'라는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어떤 사람은 난소에 기형종이, 누구는 자궁내막증이 있었고, 또 누군가는 자궁내막암을 진단받기도 했다. 20대 여성들이 이렇게 흔하게 산부인과 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대학병원 산부인과 병동 복도에서 내 옆에 앉아 기다리던 그 많은 젊은 여성들이 막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털어놓은 이후에 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나조차도 산부인과는 아이를 낳기 위해 다니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것을, 그리고 미혼여성이 산부인과를 다니는 것은 숨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건이 구체적으로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에게 산부인과 문턱을 이렇게 높여놓게 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몇 가지 사례들이 떠오른다. 언젠가 본 증권가에서 발행되는 비공식 정보를 모아놓은 소위 '찌라시'라고 부르는 것에 여성 연예인이 산부인과 복도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곧 그 연예인이 임신중절 수술을 받으러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또, 임신한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에 왔던 남편이 병원에서 어떤 여자 연예인을 마주쳤는데 집요하게 간호사에게 저 연예인이 뭐 때문에 여기에 왔냐고 물어봤다는 소문 같은 것들이 아마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데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결혼을 하지 않은 내가 산부인과를 드나든다는 것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또 하나의 큰 원인은 교육의 부재다. 지금 여학생들이 어떤 교육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라면서 그 누구도 나에게 월경통이 그 정도로 심하면 산부인과를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없었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공식 교과과정의 성교육시간에 이런 중요한 얘기는 당연히 빠져있었다. 그때는 아기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해서 사랑을 하게 되면...'이라는 짧은 문장 하나로 설명을 끝냈을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간지 거의 8년이 지난 지금, 산부인과 치료를 받는 젊은 미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을까? 내가 적극적으로 내 사정을 말했을 때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안전한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에 내가 느끼기에 세상은 조금 바뀐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미디어에는 '처녀에게도 생길 수 있는 자궁근종' 같은 말도 안 되는 제목의 기사들이 보도되기도 한다. 내 친구들 중 산부인과 치료를 받으면서 가족이나 회사에 사실을 말하고 적절히 휴가를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종양 제거 술을 받으면서도 끝내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하는 경우도 여럿이다. 무슨 큰 잘못이나 한 것처럼 병을 숨긴다. 특히 남자 친구나 파트너에게 질병의 상태를 더욱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때가 많지만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질까 봐'라는 이유로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 자궁근종이나 자궁내막암 등은 성경험이 없는 여성에게서 발생률이 높아지고 있는 질환들이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산부인과는 '치료를 받으러'가 아니라 '드나드는'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만약 다른 병이었어도 이렇게까지 스스로의 건강상태를 말하는 것을 꺼렸을까? 자궁이나 난소도 그저 내 몸의 장기 중 하나인데 왜 우리는 산부인과의 문턱을 닳도록 넘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몰래 담을 넘어 다니듯 하는 것일까. 감기 걸리듯 흔히 걸리는 질염과 자궁내막증, 자궁근종, 자궁선근증, 자궁경부의 염증이나 암, 난소에 생길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종양,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성병들. 병원에 다녀야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치료할 수 있는 질환들이 너무 많다. 월경통이 심하게 있거나 월경의 색이나 형태가 평소와 다를 때, 월경 때가 아닌데 출혈이 있거나 냄새가 평소와 다를 때, 분비물이 평소보다 많아질 때 주저 않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 2020년부터 이미 질환이 확인된 경우에 추적검사를 하거나 확인되지 않았지만 증상이 있어 검사가 필요하다고 의사가 판단할 경우 생식기 초음파가 건강보험에 적용되어 비용 부담도 크게 줄었다. 나는 요즘 만나는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알리며 최소 2년에 한 번은 초음파 검사를 받아 볼 것을, 국가검진에서 2년에 한 번 지원해 줄 때 자궁경부암 검사를 받을 것을 권한다. 열이 나거나 운동을 하다 다쳤을 때, 갑자기 시력이 떨어지거나 이가 아플 때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을 찾는 것처럼 산부인과의 문턱도 낮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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