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면허에서 크레이지 드라이버가 되기까지

미국에서 운전면허 따기

by 아마로네

나는 고3이 끝난 겨울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본 적이 없는 찐장롱면허다. 운전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대중교통의 천국 서울에서는 그다지 운전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머무르면서 차 없는 미국생활의 답답함을 익히 체험했기에, 이번엔 무조건 가자마자 차를 사리라 다짐했다. 출국 얼마 전 아빠와 함께 아파트 단지와 강변북로 등 주변 도로를 조금씩 운전하는 연습을 하며 약간 자신감을 키웠는데, 호기롭게 명동까지 나섰다 사이드미러를 치는 접촉사고를 내는 것을 마지막 주행기록으로 남기고 출국하게 되었다.


운전도 못하지만 우선 차부터 구입했다. 오른쪽 사이드미러에 카메라가 달려있는 점은 차선 변경이 가장 어려운 초보운전자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기능이었기에, 예산을 약간 벗어났지만 바로 사인을 하고 말았다. 남들은 첫 차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던데, 난 운전을 워낙 못해서 그런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 차를 어쨌든 끌고 다녀야 하기에 운전 선생님을 구해 정식으로 배우기로 했다.


여행비자 이외의 비자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면 원칙적으로 국제 운전면허증은 한 달만 유효하다. 간단한 테스트나 서류 작업을 통해 다른 국가의 운전면허를 현지 면허로 쉽게 바꾸어주는 주도 있지만, 내가 있던 곳은 미국 운전면허를 처음부터 따야 했다. 필기와 실기로 구성된 시험 중 필기는 간단하지만, 실기는 워낙 어려운 데다 한국과 은근히 다른 규칙이 많아서 1-2번 운전 수업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좌회전 신호등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아, 좌회전을 하려면 앞으로 슬금슬금 나가다가 직진 차량이 오지 않을 때 재빨리 지나가야 한다. 이미 앞으로 나왔는데 초록불이 끝나버렸다면 노란불-빨간불로 바뀔 때 지나가는 것이 허용된다. 운전경력이 길고 능숙한 편인 남편도 이 좌회전에 익숙해지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지인에게 소개받은 강사님은 프리우스를 소리 없이 부드럽게 운전하고 나타나셨다. 50대 정도의 한국인 남자분이셨는데, 예상과 다르게 부드럽고 친절한 존댓말로, 하지만 단호하고 세세하게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전달해주시고 운전 습관을 교정해주셨다. 나 같은 초보를 가르쳐 본 적은 많지 않으신 거 같았지만 프로답게 당황하지 않으셨다. 나도 몰랐던 내 차의 기능들을 알려주신 것은 보너스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운전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건 운전면허 시험 마지막 관문인 도로주행 연수 때 만난 강사님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4-50대쯤 되었을 것 같은 남자 강사분이었지만, 그분은 어린 학생이 깜빡이를 반대로 켜거나, 속도를 너무 못 내거나, 차선 변경을 제때 하지 못하면 큰 소리를 치거나 팔뚝을 때리며 주의를 줬다. 마침 그 동네는 주변에 공사장이 많아 공사용 대형 차량들이 유난히 많은 도로여서, 운전석의 나는 더욱더 위축되었다. 지금이었으면 그런 대우를 참지 않았겠지만, 학교에서 체벌도 만연했던 시절에 초중고를 갓 졸업한 학생이 그럴 수 있었을 리 없다. 나는 대신 '난 운전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아'로 결론짓고, 주민등록증 이외의 신분증이 생겼음에 만족했던 것이다.


십여 년 만에 나는 운전에 (생각보다는) 재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운전면허 실기에 한 번에 합격한 건 나 하나뿐이었다. 다들 한국에서 운전깨나 했다는 사람들이지만, 그 경력이 독이 되어 한국 운전습관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게다가 미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사고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나였다. 물론 운전실력보다는 운이 많이 따른 것이기도 하고, 나 스스로 벽이나 구조물을 긁은 것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운전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탁 트인 프리웨이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달리다 보면, 마음이 붕 떠오르는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체구간 또한 예쁜 하늘을 보며 멍 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니 그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나 운전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네'라는 자신감, 그거였다. 잃어버린 세월이 아쉽지만, 이제라도 조금 다른 나를 하나 더 발견한 게 참 반갑다.


요즈음 운전을 하다 가끔 생각해본다. 외부 환경,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압박 같은 것 때문에 묻어두고 있는 나의 잠재력이 또 있지 않을까? '그건 나랑 안 맞아', '난 그거 잘 못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실제로 내가 제대로 해본 것이 얼마나 있을까? 몇 년 전에 아니었던 것이 지금은 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전복의 순간은 생각보다 꽤,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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