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이 Apr 30. 2021

안부 없는 대한민국을 꿈꾼다.

무례한 안부에 대해서

무미건조해 죽겠다. 너무 건조해서 바스라진 나뭇잎처럼 온몸이 지끈거리고, 머릿속은 어제 남긴 찬밥을 담은 밥그릇처럼 뻑뻑하다. 매일 똑같은 방법으로 하루를 보내고, 매일 비슷한 시간에 잠들어 일어나고. 정말이지, 신이 날 보며 관찰일기를 쓴다면 이렇게 밖에 못쓰겠다.


[어제와 똑같음.]


하지만, 어제와 똑같은 짓을 계속해서 해내는 게 우리 사회가 장하다 칭찬하는 '존버'가 아닌가? 존버를 버텨낸 결과물은 빛날지언정, 존버를 버텨낸 과정마저 빛나기엔 어렵다. 너무 결과론적인 말이겠지만, 버텨내는 일이 그만큼이나 힘들고 고되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 과정을 이야기할 때에 과정을 빼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하듯 말이다.


애초에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이젠 잘 모르겠지만, 아직 내 삶의 절정까지 도달해본 적은 없는 거 같다. 한마디로 난 아직 성공 전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선명하게 정했다. 그리고, 그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선명하게 정하는 데에도 꽤 다양한 '존버'가 필요했다.


처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이 합을 이뤄 끝까지 '존버'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행운을 겪지 못한다. 난 일찍이 그런 행운을 포기하고 여러 갈래의 길을 드나들며 '존버'했다. 여러 가지 도전해보고 낙담해보고, 결과를 얻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20대 중후반부터 주위에서 떠들썩하게 굴기 시작한다.


뭐하고 지내?


안부로 위장한 호구조사가 마구잡이로 이뤄진다. 내가 한창 일하고 연애할 때엔 그런 연락조차 받지 못했지만, 내가 내 길을 찾으러 존버라는 터널을 거닐 때는 어쩜 그렇게도 잘들 찾아내어 내게 안부를 묻는지 모르겠다. 친구로서 궁금해서, 친구로서 걱정돼서 라는 말로 얼마나 난자를 당했는지 지금도 그 상처가 여전할 지경이니까.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남들에게 안부 묻기가 조심스럽다. 그리고 정말 '안부'만 묻길 반복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지. 영양제는 잘 챙겨 먹는지. 가족분들은 잘 계시는지. 키우는 멍멍이나 냥이들이 잘 지내는지. 삼시세끼는 잘 먹고 지내는지. 커피는 많이 줄였는지.


내 친구들이 내게 물었으면 좋겠는 안부들만 내 친구들에게 묻는다. 사실, 안부라는 게 원래 이런 게 아닐까? 얘가 지금 '존버의 터널'에 갇혀있는지 아닌지를 묻기 위한 게 아니라, 정말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는 게 안부가 아니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렇게 백날 떠들어 대도 그런 사람들에겐 소용없는 짓이다. 왜냐면 그들은 안부를 가장한 '기만'을 위해 다가온 거니까.


애초에 그런 사람들이 정말 몰라서 그따위로 안부를 묻는 거라면, 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에세이 책과 sns 게시글들이 그들을 향해 지적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을까? 그들은 고칠 생각이 없다. 앞으로도 쭉 고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절대 고쳐 쓰는 게 아니니까.


요즘은 솔직히 살 만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갈 길을 선명하게 정했고 무미건조한 존버를 이룩하니 아~주 살만한 건 아니더라도, 살만하다. 이쯤이면 2018년부터 2021년 모두 포함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오늘도 안부 묻기를 꺼려한다. 마치, 안부 알레르기라도 생긴 사람처럼 근본적으로 꺼려진다.


이대로 간다면 대한민국은 안부 없는 사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게 더 따듯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난 오늘도 안부 대신 인사만을 건넨다.

작가의 이전글 태생이 무심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