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이 May 08. 2021

새벽에 찾아온 젠틀한 손님

고작 거미 한 마리와 고작 인간 한 마리

거미 잡기를 좋아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잡은 거미를 안전하게 풀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며칠 전, 아파서 겨울용 이불을 애벌레처럼 감싼 채 누워있었다. 원래라면 약속한 원고를 수정해야만 했지만 도무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대로 쓰러지듯 잠에 들었고, 새벽 4시에 해뜨기만을 기다리던 닭처럼 몸을 일으켰다. 창문에선 푸르스름한 햇빛의 잔상이 비쳤고, 내 침대 위로 크고 튼실한 거미가 지나가고 있었다.


무리해서 표현하자면 손바닥 절반 크기였다. 등갑부터 발끝까지 중요한 약속이라도 잡은 듯, 블랙 정장을 단정히도 차려입은 멋진 녀석이었다. 몇 년 전까지도 타란튤라를 키웠기에, 그 정도 크기로 놀라 자빠지진 않았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 놀라 자빠졌겠다. 그만큼이나 크고 튼실한 녀석이었으니까.


녀석은 내 움직임을 눈치채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제는, 8개의 발이 향한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 녀석은 침대와 벽 사이를 집요하게 노렸지만 커다란 덩치가 들어가기에는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녀석은 양심이라도 있는지 유턴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녀석에게 양심까지 있는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게다가 내가 거미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거마냥 침착하게 굴었다. 거미를 극도로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장 거미를 향해 손을 내리치거나 옆으로 쓱 밀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재수 없으면 무거운 책에 압사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거란 걸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참으로 신기한 녀석이었다.


한국에 살고 있는 거미들은 대체로 큰 편은 아니다.(물론, 내 기준에서) 그런데도 이 녀석은 덩치가 꽤 컸다. 오랫동안 양질의 먹이를 잘 먹었고, 탈피도 꾸준히 잘 해온 덕이겠다. 그런 노력으로 살아남은 녀석을 쉬이 죽이고 싶은 생각도,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도 절대 없었다. 따라서, 난 이 녀석을 담을 그릇을 찾아야만 했다.


거미를 잡을 때에 흔히 하는 실수가 있다. 거미 다리보다 내 손과 눈이 빠를 거란 오만이다. 타란튤라 중에서 오너류를 기르다 보면, 순간이동을 자주 목격한다. 나 역시 오너류를 길러봤기에, 함부로 다리 8개 달린 녀석들을 무시하거나 내 손과 눈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이컵은 탈락이다.


아무리 찾아도 덩치를 담을 그릇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빠르고 덩치 큰 녀석을 홀로 두고 거실로 나가 담을 그릇을 찾아야 한다. 운이 좋다면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겠지만, 알다시피 운이란 건 모험이지 않은가. 살금살금 뛰어나가 담을만한 그릇을 가져와 녀석을 찾았다. 다행히도 녀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줬다. 이쯤 되니, 내가 자신을 안전하게 구조해서 밖으로 편안하게 옮겨주길 바라는 듯했다.


서둘러 준비한 그릇을 녀석이 향한 방향에 기울여놓고, 실례지만 엉덩이 쪽에 바람을 후후 불어줬다. 녀석은 깜짝 놀라며 꽁지가 빠지게 그릇 속으로 돌진했다. 성공인 셈이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에 현관문을 열어 화단까지 걸어가 녀석을 풀어줬다. 그리고 그 쿨한 녀석은 내게 인사라도 하듯 느긋하게 걸어 나와 화단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어릴 적부터 거미가 무섭게 생겨서 죽여야 한다는 친구들을 응징해왔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당시 반 친구들과 어색한 시기였다. 음악시간에 단소를 불어야 했기에 연습에 한창이었다. 교실 한편에 선 남자아이들 무리가 시끄럽게 떠들었고,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시선을 돌렸다. 남자애들 중 몇 명은 바닥을 향해 발길질을 하며 신난 듯 마구 웃기까지 했다.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저들이 밟고 있는 것은 벌레라는 것을. 그중에서도 거미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자아이들 무리로 끼어들며 하지 말라 소리쳤다. 이름조차 모르는 애들이었지만 그까짓 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뭐가 재미있는지 더욱 세차게 거미를 밟았다. 검은색 3줄짜리 슬리퍼들이 지나간 흔적에는 거미였던 것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처참했다.


"거미는 죽여야 해."


내 귓가에 때려 박듯 말을 던져두고 멋있는 척 우쭐대며 비웃어댔다. 순간, 뒤로 돌아 단소로 머리통을 내려쳤다. 똑같이 비웃어주진 않았지만 보이는 곳마다 아주 혼쭐을 내줬다. 마치 늦게 들어온 손주가 할머니의 빗자루로 혼나듯이 말이다.


1학년 1학기부터 선생님께 혼이 나겠거니, 부모님 면담 혹은 정학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저, 거미를 밟아 죽여놓고도 영웅인양 떠들어대는 꼴에 화가 치밀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태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우리 반에 들어온 거미들은 모조리 밟혀 죽을 거란 불안감이 내 눈을 가렸다.


난 거미 비질란테였다. 이유 없이 생명을 죽인 것에 대한 응징을 감히 직접 한 것이다. 주위에 있던 애들 중 날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휘두르는 단소에 함께 맞을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엔 오로지 거미를 마지막까지 밟은 남자애만 보였다.


아이러니하다. 거미의 생명은 아끼면서 같은 반 친구를 단소로 때리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다행히 전후 사정을 다 들어주신 담임 선생님께선 내게 주의만 주셨다. 내가 때린 남자애는 평소에도 친구들에게 패드립하기로 유명했던지라, 오히려 생명을 중요시하지 않았다며 혼이 났단다. 매는 본인이 맞았는데, 혼까지 나니 얼마나 우울했을까. 그래서인지 그 남자애는 다음날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적어도 내가 속한 반에서는 거미들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어졌다. 내게 맞은 남자애도 더는 거미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를 죽이며 내게 물었다.


"이건 죽여도 되지?"


글쎄. 그건 내가 정할 일은 아닌데. 그래도, 바뀌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인사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더불어, 그 남자애는 해충을 제외한 곤충을 죽이지 않게 됐다.




그 남자애가 거미를 밟아 죽이던 그날을 떠올리자면 절대 처음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거미를 죽여봤고, 자잘한 곤충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죽여본 솜씨였다. 그래서 더 화났을지도 모르겠다. 제발 죽이지 말라는 고함에도 잔악하게 죽이는 행동은 이미 학습된 행동이었기에. 나아가, 남자애의 보호자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유치원 때에도 초등학생 때에도 어제도 말릴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들이 할 일을 내게 떠넘겨서 매를 들게 만드냐는 14살의 내 생각이었다.


사소한 걸 사소하다 방치하는 순간, 더 이상 사소하지 않게 된다. 우린 끊임없이 사소한 것에 대해 주의하고 돌아봐야 한다. 그게 우리가 인간으로서 해야 할 기본 의무가 아닐까? 고작 거미 한 마리가 되는 순간, 인간도 우주에서 고작 인간 한 마리가 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안부 없는 대한민국을 꿈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