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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은 구근식물의 일종이다. 식물학적으로는 지중식물이라고 하는데, 튤립 구근은 땅 속에서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면 지상에서 꽃을 피우며 충분한 영양분도 얻는다.
튤립 하면 네덜란드가 떠오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원예용 튤립은 원래 네덜란드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에서 널리 재배되었다고 한다.
백합, 히아신스, 크로커스, 튤립과 같은 구근식물은 꽃을 피우고 난 후 자원을 다시 거두어들여 양파 모양의 구근 형태로 휴식을 취한다. 뜨거운 열기나 냉기가 미처 닿지 못하는 땅속에서 충분히 쉬면서 다음 해 꽃 피울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휴면 기간 덕분에 구근식물은 15~16세기 일찍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방에서 유럽까지 쉽게 운반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이동해도 식물이 상할 염려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의 짐에서 차지하는 부피도 적었기 때문이다. 워디언 케이스를 통해 배를 타고 힘들게 열대지방에서 온 식물들과는 달리 조금은 쉽게 서양 사회에 스며든 셈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튤립이 고귀하거나 부유한 사람만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늘날의 명품 같은 존재였던 것일까? 파인애플도 한때는 영국에서 부유함을 자랑하는 수단이었다니 열대나 동방의 식물들이 서양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투기의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튤립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고가의 구근 하나가 평범한 시민 연봉의 10배 이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집 한 채와 맞먹는 가격까지 올라갔다고...
당시 네덜란드는 해양 무역의 성공에 힘입어 경제 대국으로서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윳돈이 넘쳐났고 귀한 튤립 구근에 투자하는데 몰두했다.
그런데, 집 한 채 가격을 넘어설 정도로 엄청나게 가격이 오르자 어느 날 튤립 경매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에 튤립 구근의 가격은 크게 폭락했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엄청난 돈을 잃은 후였다.
이는 나라의 경제까지 뒤흔들 정도의 규모여서 결국 네덜란드는 경제 대국의 자리를 영국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튤립 구근 하나가 세계사를 바꿨다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튤립 구근 중에서도 희소가치가 있어 특히나 비싼 가격을 자랑했던 것은 얼룩무늬 꽃을 피우는 브로큰이라는 종이었다. 기이한 무늬가 있는 종일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이 튤립의 무늬는 사실 진딧물이 옮긴 세균에 감염되어 생긴 것이라고 한다. 희귀한 무늬는 결국 바이러스의 결과였던 것이다.
요즘에도 희귀한 무늬가 있는 종이라면 가격이 크게 치솟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결국은 조직배양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수요에 맞추어 공급이 이루어지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도 새로운 식물을 찾게 되면서 가격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게다가 무늬종의 경우는 무늬 부분의 엽록소가 부족해 광합성에 취약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그리 튼튼하지 못하다. 엽록소 부족은 식물이 빠르고 튼튼하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식물의 입장에서는 그리 이로울 게 없을지도 모른다. 원예종으로 일부러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돌연변이의 결과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무늬종은 항상 식집사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 옛날 바이러스가 만든 희귀한 무늬의 튤립처럼 키우면 왠지 가치가 있는 것 같고, 우월감이 들게 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어 보인다.
방울복랑금이라는 다육이는 한때 수백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열풍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제는 원예시장에 매우 흔한 식물이 되었다. 몬스테라 일부 품종과 밍크 선인장 등 많은 식물들이 한때는 돈주고도 구하기 힘들었던 걸 생각하면 조금 허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별한 무늬종이나 희귀 식물이 어렵고 침체된 화훼 농가와 원예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때로는 튤립 버블의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튤립이 일으킨 광풍은 빅토리아 시대 양치식물, 앵초, 난초 등으로 옮겨가며 계속된 덕분에 사람들은 지속적인 채취 활동으로 숲을 짓밟았으며 결과적으로 숲의 생태계를 파괴해 왔다.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멸종되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다른 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 식물 연구팀이 조사하고 간 지역은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다음 조사 시에 찾아가 보면 귀한 식물을 흔적도 없이 캐내어 가고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원예시장에서 겨우 명목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다시는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식물도 많다. 상업적 번식으로 우리 주변에 흔한 금호선인장도 야생에서는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참 고가를 자랑하다 지금은 가격이 하락세를 그리고 있는 알로카시아 프라이덱은 원산지 필리핀에서 불법 채취가 엄격히 금지될 정도로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이런 식물들의 리스트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예쁜 튤립을 보며 튤립버블이 가져온 경제 몰락과 희귀 식물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을 떠올리는 건 그다지 재미없는 일이다. 식물에 대한 소유욕이 그야말로 그득그득한 나 자신도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식물을 사랑한다면 식물로 돈을 벌려는 식테크나 귀한 식물에 대한 집착보다는 식물이라는 생명체와의 유대를 먼저 소중히 여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자료
1. 세계를 정복한 식물들 / 스티븐 해리스
2. 2천 년 식물 탐구의 역사 / 애너 파보르드
3. 무섭지만 재밌어서 밤새 읽는 식물학 이야기 / 이나가키 히데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