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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욱 Aug 12. 2021

절멸의 시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10월 항쟁』

『10월 항쟁』, 김상숙, 돌베개, 2016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해방 후 전국에 일렁였던 건국에 대한 뜨거운 열망은 각지에서의 건국운동으로 이어졌지만,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은 이를 거세게 탄압했다. 단독 정부 수립 이후 탄압은 더욱 지독해졌다. 한국전쟁 전부터 곳곳에서 집단학살이 있었고, 전쟁 발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승만의 반대세력은 말 그대로 거의 절멸되었다.


『10월 항쟁』은 그 절멸의 과정을 겪은 대구·경북지역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다만 이 책이 드러내는 삶의 모습은 무지막지한 국가폭력 앞에 무기력했던 피해자의 모습이기보다는 그 폭력 앞에서도 어떻게든 스스로의 삶과 그를 둘러싼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려 했던 주체로서의 모습이다. 흔히 ‘대구 10.1 사건’ 혹은 ‘대구 10.1 폭동’이라고 불리는 10월 항쟁은 1946년 10월 대구·경북 지역에서 미군정의 탄압에 민중들이 항거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미군정이 일제 관리와 경찰을 재임용하고 착취적인 방식의 식량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항쟁의 주체는 노동자, 학생, 빈민, 농민 등으로 다양했다.


해방 직후의 건국운동부터 대구·경북에서의 10월 항쟁, 이후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비합법투쟁으로 전환된 무장투쟁의 과정과 항쟁 관련자들에 대한 학살까지. 저자는 항쟁의 주체들 중 어떤 이들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항쟁의 과정과 원인, 그리고 그 영향을 세심하게 써내려간다. 또한 거의 모든 장마다 배치된 당사자들의 구술은 읽는 이들이 보다 생생하게 그 시절의 공기를 느끼게 해준다.


‘무명의 말단 활동가’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들은 주로 마을의 2,30대 남성들로, 산에서 활동하던 유격대와 마을 주민의 매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유격대를 돕기 위해 산과 마을을 왔다갔다 했고, 때에 따라서는 군경에게 동원되기도 했다. 군경은 산속으로 숨어든 유격대를 토벌하기 어려웠기에 유격대와 접촉했던 이 청년 남성들이 1차 토벌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았다. 국민보도연맹 학살 피해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2,30대 남성이기도 한데, 전쟁 전의 학살을 피했던 이들도 결국 죽음을 맞은 것이다.


‘말단 활동가’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평가는 다소 박하다. 주민들은 그들에 대해 ‘무지하고 철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저자는 이런 비하와 무시의 “바탕에는 패배한 그들에 대한 실망감도 내재해 있지만, 자신과 내전기를 함께 겪었던 그들의 죽임을 애도하는 연민의 마음도 숨어 있으”며 “구술자 자신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에 대한 숨겨진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아무리 그들이 무지하고 철없었다고 해도 죽을 만큼의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 변화를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또 스스로도 진압과 저항의 시간 속에서 생존을 모색했던 그 시간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항쟁에 참여한 이들,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그들과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이들 모두 해방 이후 새 세상과 새 날을 꿈꾸었다. 절멸은 단순히 수많은 육체의 죽음만을 뜻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진압과 저항 속에서 서서히 스러져갔을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절멸 이후에도 절멸에 대한 기억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살아남은 이들을 괴롭혔다. 저자는 아직까지 “분단·반공체제 아래 이념 갈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 당시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구술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말하기에는 아직 자유롭지 않다”며, 어쩌면 이제 점점 노쇠해가는 구술자들의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책의 끝부분에는 채영희 10월항쟁 유족회장과 나정태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장의 구술이 담겼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던 사실들이 내 속에 응어리져 뭉쳐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이 모여서 고생했던 얘기, 이런저런 얘기, 끝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좋고. … 아직 말 못하고 숨어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같이 얘기하고 마음을 드러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채영희)
예순아홉 살까지 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고 내 마음을 털어놓고 날 인정해주는 사람도 있고. 이거(유족회 활동)는 누가 시킨다고 될 일도 아니지요. (나정태)

이러한 고백은 1999년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전국 각지에서 유족회를 중심으로 진실규명 활동이 벌어지면서 가능해졌다. 진실규명은 그 자체로는 과거의 진실을 발굴하는 것이지만, 오랫동안 숨죽여 살아왔던 이들에게 미래를 내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는 곧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또다른 절멸의 시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발굴하고 미래를 내어주는 일은 그래서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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