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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욱 Aug 12. 2021

진심의 무늬

《단순한 진심》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민음사, 2019


이름

이름은 ‘주어진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이름을 지은 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 경우에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야 스스로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 속 어느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 내가 관여하지 않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이미 생의 시작부터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소설은 ‘나’가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는다. 그는 세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입양된 프랑스 가정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 나나. 입양되기 전 머물렀던 고아원에서 원장 수녀가 지어줬던 이름, 박에스더.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이름, 문주. ‘문주’는 그의 ‘시원’이지만, 그렇기에 그가 가장 아파할 수밖에 없던 이름이다. 이름을 지었던 사람이 다시 그를 버렸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문주’라는 이름은 ‘생애의 접힌 모서리’다. 버려지지 않았더라면, 다른 이름을 갖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문주’라는 이름은 그를 소외시켰다. 버려졌다는 사실은 일생 동안 그에게 벽이었다. 그런 그에게 젊은 영화감독 서영은 그 이름의 기원을 찾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요청해온다. 최근에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서영의 요청을 거절하려 하지만, “이름은 집이니까요.”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서영의 메일을 읽고 한국행을 결심한다. 만약 자신의 기원을 찾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인 ‘우주’를 ‘더 떳떳하게 환대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면서.


선의

서영은 메일에서 이렇게 쓴다.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세계에 대한 예의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나는 이들마다 이름과 그 뜻을 묻고, 그가 방문하는 장소의 지명에 대해서도 궁금해 한다. ‘서영’은 새벽의 수정이고, ‘이태원’은 겁탈당해 아이를 낳고 살던 여자들을 ‘이타인’으로 불렀다는 데서 유래했다. ‘아현’은 아이들을 묻었던 매립지라는, ‘애고개’라는 지명에서 나왔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이름을 만나고, 그 이름을 기억하려 한다. 동시에 복잡다단한 현실의 가혹함과 마주한다. 해외입양 문제와 기지촌, ‘혼혈’ 혹은 ‘튀기’라고 불려야 했던 아이들…. 이름은 찾으려 할수록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다가오고, 타인의 삶 또한 그렇다. 이름이 주어지는 것이 이미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일까. 자신의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거의 필연적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복희를 만난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그에게 음식을 대접했던 사람. 오래 전 자신이 받아내고, 정성으로 키웠던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냈던 사람. 복희 또한 누군가를 버린 사람이기에 그는 복희를 멀리하려 하지만, 동시에 복희는 입양 보냈던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이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복희와 더 깊이 관계하는 과정에서 그는 복희의 삶을 조금씩 알아간다. 기지촌에서 수없이 지워지거나, 태어나도 사회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아이들이 있었다. 태어난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내몰린 곳에서 한 번 더 내몰려야 했다. 그들을 보듬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는 복희의 삶을 통해 ‘버림’과 ‘버려짐’의 이분법 이면에 있는 복잡한 결을 발견한다.


‘버려졌던’ 그가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들은 무엇일까 묻게 된다. 그가 기억하는 생의 첫 시기는 이렇다. 그는 철로에 버려졌지만, 동시에 철로에서 발견되었다. 기관사 정우식은 그를 거두고 먹이고 입혔으며 ‘문주’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물론 정우식은 다시 그를 버렸다. 거둬주고 돌봐줬음에도 왜 다시 버려야 했을까란 질문은 일생동안 그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다르게 묻기 시작한다. 왜 나를 거두고 돌봤을까. 프랑스인 부모였던 앙리와 리사, 서영과 복희는 왜 나를 환대했을까.


진심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선의 덕분이었다. 하지만 선의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은 아니다. 한 줌의 선의조차 겪지 못한 사람도 있다. 어떤 악의가 복잡하게 뒤엉켜 억압과 차별을 켜켜이 쌓아 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사람에게, 선의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기만일 수 있다. 복잡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거짓말.


소설의 제목은 ‘단순한 진심’이다. 진심이라는 단어에 단순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릴까? 등장인물의 사연은 하나도 단순하지 않은데. 그들이 서로에게 베풀었던 선의 또한 단순하지 않은데. 각자의 고민과 사연 속에서 선의는 거의 가까스로 직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야 선의는 비로소 누군가의 아픔을 덮어줄 수 있었다. 단순한 것은 딱 하나다. 선의가 베풀어졌다는 것. 누군가의 선한 마음이, 진심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그 진심으로 인해 누군가는 주린 배를 채웠고, 몸을 눕힐 곳이 생겼으며, 그렇게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전달되지 않았다면, 마음은 진심이 되지 못한다.


세계라는 단어를 되뇔 때가 있다. 세계는 거대하고 복잡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세계만큼의 무게를 갖고 살아간다는 사실에 막막해질 때가 있다. 정우식의 딸인 문경은 문주라는 이름의 의미를 이렇게 추측한다. ‘우주의 무늬紋宙.’ ‘생애의 접힌 모서리’를 가진,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접힌 모서리는 반듯하지 못하지만 그 모서리들이 모여 끝끝내 어떤 무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문주는 복희의 삶을 살피며, 복희가 속했던 기지촌 안에서의 ‘그 공동체는 순도 높게 아름다웠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따금씩 목도하게 되는 그 세계의 무늬는 진심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진심만이 사람들을 함께 살아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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