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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화 Apr 12. 2021

1. 시대의 새벽을 먼저 걸어가다

1) 나라를 위해 목숨도 바치리라

"장군, 군량이 모두 바닥났습니다! 그리고 원군은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관의 비통한 목소리가 장군의 귓가에 울렸다.

장군은 문득 먼지 묻은 얼굴을 들어 화살과 전화로 엉망이 된 백상루의 현판을 바라보았다. 

"그래...... 군량도, 원군도 없구나."

장군을 둘러싸고 서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부쩍 코 훌쩍이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불과 5일, 성곽 바깥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 중인 저 오랑캐들이 안주성의 조선군을 몰아세워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한 시간은 불과 5일이었다. 

든든하게 안주성을 지키던 평안병사 남이흥과 안주목사 김준은 오랑캐들의 항복 요구를 거절하고 관아에 불을 놓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제 안주성에는 백상루를 둘러싼 장군과 그의 수하들 뿐이었다.

장군은 문득 고개를 돌려 마지막을 함께하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지친 얼굴, 망가진 몸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들으라! 이제 더 이상 군량이 없다. 원군도 오지 않는다!"

장군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누르며 울부짖었다.

"병사들이여! 지금 성을 버리고 흩어져 달아나면 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아볼 자신이 없구나. 패잔병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여기에서 빠져나가 살아본들 어찌 눈을 감을 때 조상님들을 뵈오리오!"

그리고 장군은 병사들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병사들이여! 나를 용서하지 말라. 이 못난 장군을 죽어서도 원망하라. 나는 이 조선의 깃발을 휘감고 마지막 한놈까지 저 오랑캐들을 베다 이 자리에서 뼈를 묻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리 만만치 아니함을 만천하에 알리리라!"

병사들 사이에서 들려오던 코 훌쩍이는 소리는 점점 흐느끼는 소리로 변해갔다. 

장군의 각오를 들은 후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어떤 이들은 부모와 형제, 자식의 이름을 눈물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장군은 병사들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문득 두고 온 가족들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아내, 자식들, 그리고 부모님의 따뜻한 얼굴이 눈가에서 아른거렸다.

장군은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병사들을 바라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전군! 나가 싸우자! 마지막 한 놈까지 베어라!"



(1) 자신을 불태워 나라를 지키다

전상의 장군의 충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민사 신도비

 전상의(全尙毅) 장군은 1575년(조선 선조 8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전용(全蓉)의 아들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용력이 탁월하고 무예가 뛰어났는데, 1603년(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인 1617년(광해군 9년) 일본으로 건너가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간 150여 명의 백성들을 귀국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1625년(인조 3년), 구성도호부사 겸 좌영장으로 제수되어 변방의 방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중국 대륙의 권력 구조가 격변하던 위태로운 시대였다. 당시 종주국을 자처했던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급격히 쇠락해져 이민족들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시기 대륙에서 가장 강력했던 민족은 여진족이었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후금이라 칭하며 만주 일대를 토대로 명나라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가 새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후금보다는 명에 기울어진 인조의 새로운 외교정책에 후금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627년(인조 5년), 후금의 3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점령하고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폐위된 왕이었던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으로 쳐들어온 후금의 대군 앞에 임진왜란을 거치며 쇠약해진 조선군은 곳곳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때 일어난 전쟁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1627년(인조 5년), 불과 일주일 만에 의주를 점령하고 남하한 후금군의 앞에 놓인 것은 고구려 때부터 요충지로 수비돼 오던 안주성(安州城)이었다. 그리고 그 안주성에는 바로 전상의 장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5일간의 싸움은 치열했다. 성이 무너지고 관아를 내줄 수 없다며 평안병사와 안주목사가 관아와 함께 폭사하는 등 조선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결국 항전 도중 주둔군의 군량은 바닥이 났고, 구원병이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전상의 장군은 자신 휘하의 병사들과 최후의 항전을 결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안주성 백상루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충신의 죽음에 감동한 후금군은 그의 시신을 예를 갖춰 거두어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장군의 시신은 장군이 태어난 고향인 광주로 보내져 안장되었다. 


 이후 1849년(헌종 15년) 장군의 충심을 기리기 위해 광주의 경열사, 제주의 귤림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현재는 광주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충민사에 배향되어 매년 10월 중순 제사를 치르고 있다.



(2) 충민사, 충신을 영원히 기리다.

충민사 창절문

 무등산 제4수원지 방면에서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 원효사를 향해 쭉 운전하다 보면 정면에 나타나는 큰 주차장과 문화유적이 있다. 드라이브 코스 중반에 위치해 많은 관광객들이 주차장에 차를 잠시 대어 두고 창문을 내려 바람을 마시며 쉬곤 한다. 가끔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은 내려서 안내판을 읽어보기도 한다. 해도,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차분하고 조용한 곳. 이곳이 바로 조선의 충신, 전상의 장군을 기리고자 세워진 충민사이다. 

 

 충민사는 조선 시대의 충신인 전상의 장군을 배향한 사당이다. 광주에서 태어나 안주성에서 뜨거운 생을 마감한 그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고 계승하고자 광주 무등산 자락에 건립하였다. 충민사는 충렬공 고경명 장군을 배향한 포충사,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배향한 충장사와 함께 광주의 3 충신을 기리는 사당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의병장이었던 고경명 장군과 김덕령 장군에 비해 정묘호란 당시의 충신인 전상의 장군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슬픈 현실이 있다. 그렇기에 충민사 역시 도로 표지판과 안내판 등을 통해 많이 접해본 곳이지만 실상 누구를 배향한 곳이며, 어떤 역사를 가진 곳인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충민사 수의문

 충민사에 처음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은 사당의 외삼문으로 창절문이다. 외삼문이란, 문이 세 개 달린 사당의 문 중 바깥쪽에 위치한 문을 일컫는 말이다. 가운데 문은 어칸, 즉 혼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잠가두고, 동입서출의 규칙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이는 모두 동쪽 문으로 들어가서 서쪽 문으로 나오는 것이 유교적 예법이다. 창절문은 한자 그대로 '절개를 드러내는 문'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전상의 장군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고 기리는 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충민사 사당 현판

 창절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나무들이 가득한 공간이 나온다. 우측에는 정려각이 세워져 있는데, 그곳에는 왕이 직접 내린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좌편에는 유물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전상의 장군의 유품을 본떠 만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가면 사당의 내삼문인 수의문이 사당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수의문을 지나면 전상의 장군의 표준 영정과 위패가 보관된 사당이 있다. 




(3) 구성공 전상의 장군, 광주의 역사가 되다.


 충민사의 주인공, 전상의 장군은 광주와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상의 장군은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광주의 3 충신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동시에 임진왜란에 비해 잊힌 전쟁이었던 정묘호란의 특성상 인지도가 낮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는 광주의 역사와 맞물려 아픈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때는 충민사가 무등산의 품에 그 깊은 역사를 뉘이려 할 때였다. 충민사 건립 계획은 1979년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가 무등산 자락에 있던 장군의 예장석묘 부근인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를 건립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1982년 무등산에 충민사 착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에 대한 광주 민심의 반감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전상의 장군의 성씨가 하필 같은 전 씨라는 점에서 오해의 불씨를 불러일으켜 광주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두환이 자신의 조상 사당을 무등산에 짓고 있다는 괴소문이 파다했다. 


 이러한 오해는 1985년 충민사가 완공되었을 때 극에 달했다. 당시 충민사 건립 공적비에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충민사 공적비를 부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전상의 장군의 본관은 천안이지만 전두환의 본관은 완산으로 그저 한자만 같은 다른 가문의 사람이었다. 당시 광주의 민심이 전두환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또한 국가가 가한 잔인하고 무자비한 폭력이 광주 공동체에 어떤 아픔과 상처를 주었는지 볼 수 있는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구성공 전상의 장군의 이름은 여전히 광주의 삶 속에 남아있다. 광주고등학교에서 광주대교를 지나 경열로에 이르는 긴 도로가 있는데, 그 도로의 명칭은 구성로(龜城路)이다. 이 구성로는 구성공(龜城公) 전상의 장군을 기리고자 이름 붙은 도로이다. 우리가 주변의 주소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길 이름에도 전상의 장군의 충절과 절개는 남아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재 광주광역시 봉선동에 위치한 문성중, 고등학교를 포함한 제석산 일대가 조선 초기부터 서당이 위치해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서당에서 어린 시절 가르침을 받아 성장한 인물이 바로 무신인 구성공 전상의 장군과 문신인 회재 박광옥 선생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전상의 장군이므로 영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하긴 어렵다. 광주의 충신 전상의 장군의 숨결은 이렇듯 광주 곳곳에 펼쳐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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