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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화 May 04. 2021

1. 숨 가쁜 사회, 우리의 갈림길

4-2) 나를 소모하는 일

그렇게 한층 어른이 되었고, 한층 재미없어진 중학생들은 나이가 되어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끝과 시작부터 교실을 차지하던 대다수 아이들은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이른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리고 필자는 그러한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나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이른바 ‘정상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은 아이들은 ‘한차례 걸러진 아이들’로 낙인찍혀 왜인지 모를 불안감과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학교, 친구들을 비하해야 할 정도로 그림자는 깊게 다가왔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성적에, 그리고 졸업한 학교에 달려있지 않다는 간단한 사실을 망각해버린 듯 우리들의 중학교 졸업과 새로운 시작은 그렇게 반쯤 찝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또 한 번 ‘현실의 무게’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시작해본 적도 없이 앞으로 달려만 왔던 이들이 어느새 ‘대학 입시’라는 위명 아래 무릎을 꿇고 인생을 재단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학교 주최, 교육청 주최, 그리고 각 대학 주최의 입시 설명회는 숨 가쁘게 펼쳐졌습니다. 학부모 대상의 각종 입시 학원의 설명회 역시 다 거론하지 못할 만큼 정신없었습니다. 그리고 설명회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협박과 압박은 “대학은 장래희망을 빠르게 설정하고 한 길로 장래희망을 위해 노력해온 학생을 가장 좋아합니다.”랄지, “우선 내신 점수와 수능 점수를 먼저 늘리는 게 중요하니, 장래희망을 고민할 시간에 공부부터 하세요.” 등과 같은 일견 일리 있는, 그러나 스스로를 지워야만 하는 말, 우리를 고민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들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에게 마지막 남아있던 기회와 시간을 ‘재단’당했습니다. 우리의 3년, ‘나’를 알게 되고, ‘나’를 만들어 가는 데에 가장 필요했고 소중했던 3년은 그렇게 불완전한 우리를 남겨두고는 모두 대학이라는 괴물의 몫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 당시 친구들과 함께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마다 문득 보였던 친구들의 한숨들이 가끔씩 생각나곤 합니다. 그저 그려진 선을 따라 앞으로 갈 뿐이었던 우리. 학교에서도, 집안에서도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있을 때만큼은 온전한 ‘나’와 ‘나’로 만날 수 있었던 우리. 서서히 사회 속에 파묻혀 녹아가는 ‘나’를 느끼고는 아쉬워하기보다는 담담하게 그저 포기해버렸던 우리. 그리고 불투명한 내일로 저마다 가득 안은 한숨을 현관 바로 앞에 모두 뿜어내고는 성실한 아들, 딸이 되어 현관문을 열어야 했던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숨 가쁜 가운데에서 ‘포기하는 법’을 먼저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 꿈꿔왔던 ‘대통령’과 ‘과학자’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소소했던 ‘우정’과 ‘놀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 남아있던 ‘나’ 마저도 그렇게 많이 흐려진 상태로 변해버렸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기형적 이리만치 숨 가쁘고 복잡하게 살아왔던 우리는 어느새 그렇게 ‘나’를 모두 소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주 작은 조각이나마 소중히 남아있었던 ‘나’는 이른바 교육의 과정을 겪으며 점차 줄어들다가 결국은 모래알보다 작게 줄어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줄어든 소중한 ‘나’는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습니다.


 물론 필자는 어른들의 호의를 의심할 만큼 비뚤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만큼 악질적인 가족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순수한 호의로 해왔건 조언과 권유였으며, 또 필자가 확실히 진로를 결정하고 그 길을 향해 노력해가는 지금까지의 과정이 어쩌면 성에 차지 못했을지라도 묵묵히 지켜봐 주는 가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한 행운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언자이자 권유자가 특별히 악랄해서가 아닌, 그들의 삶을 만들어온 과정 속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먼저 알아버린 결론을 조금이라도 빨리 깨우쳐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오히려 숨 가쁜 사회 속으로 우리를 너무 이르게 던져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사회를 위한 호흡이 미쳐 준비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들의 속도에 맞춰 등 떠밀려가며 살았기에 이토록 공허하면서도 숨 가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을 팔아 내일을 사려 시도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오랜 시간 속에서 ‘나’를 너무나 많이 소모해버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완성된 ‘나’이자 확실한 ‘나’ 이지만 우리에게는 내일 완벽해질 ‘나’나, 내일은 더욱 행복해질 ‘나’ 뿐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쩌면 오늘을 팔아 내일을 사려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리리 사라져 버린 오늘과 오늘의 행복을 놓아버리고는 유일한 희망인 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눈물 섞인 삶을 버텨가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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