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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당나귀 May 30. 2024

[책을 읽고] 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배수아의 베를린과 나의 베를린

언젠가 우리가 베를린을 떠난다면.

얼마 전부터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나는 종종 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으로 대화를 나눈다. 새로운 법령의 공포로 조만간 여름 정원 오두막에서의 체류가 불확실해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오두막에서 은둔할 수 없다면, 외부로부터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고 우체부도 방문객도 없는 그곳에서 살 수 없다면, 우리가 베를린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다. 은둔할 수 없다면, 집이 아니다. 은둔할 수 없다면, 여행이 아니다. 베를린은 내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시작된 도시이다. 내가 그것과 비로소 만난 도시이다. 베를린은 그것을 내게 주었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을 좋아하지 않으며, 언젠가 베를린을 떠날 수 있기를 남몰래 소망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베를린에 올 일이 없게 되고 마침내 베를린을 영영 잊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에 두고 온 가방이 있더라도

베를린에 죽은 자를 두고 왔더라도

그리고 베를린에서 연인과 재회했다 할지라도”  p.21-23  



“나는 숲을 향하고는 있었으나 숲으로 가지 않아도 좋았다.” P.54  



“들판에는 청보랏빛 수레국화와 양귀비가 만발했다. 우리는 걸었다.

질문 있었다. 행복한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음 질문. 지금 이 순간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풀들이 많이 자라나 길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길과 길 아닌 곳을 구분하지 않고 걸었다. 아지랑이같이 반짝이는 풀벌레들이 주변을 날아다녔다. 도중에 들판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최근 나는 <작별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작별들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의 저녁, 길고도 느린 구릿빛 그늘이 테라스의 장작더미 위에, 유리구슬에, 거울 조각에, 공작새의 양철 날개 위에 한없이 오래 머문다. 그러다 묽은 어둠이 고이듯이 하지의 밤이 온다. 정원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로 우뚝 서 있는데, 하늘에는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의 구름들은 여전히 선명하게 새파란 빛으로 환하게 반짝인다. 내 잠은 끊임없이 중단된다. 눈을 뜰 때마다 창밖으로 물처럼 흐릿하게 환한 하늘이 보인다. 그때마다 나는 뵈클린의 그림 <죽음의 섬>을 생각한다. 새벽 세시, 뇌우도 없이 새들이 운다. 테라스 앞 화단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국의 그림자.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영영 완성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강해진다. 나는 체념하고, 포기하고, 굴복하고, 인정하고, 마침내 울 것이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마지막 문장을 쓸 것이다. 아니, 눈물이 곧 마지막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잘 울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마지막 문장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 ” p.94  



“장소에는 마법적인 힘이 있다고 말하는 우리의 시인 친구 WG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마법적인 장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밀밭 가에 앉아 쉬었다. 물병에 한 모듬 정도 남은 최후의 물을 나누어 마셨다. 우리는 빛을 호흡하듯이 숨을 쉬었다. 고요했고, 주변에는 어떤 거주지의 흔적도,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마치 인류의 멸망 후 저절로 무르익은 최후의 밀밭을 연상시켰다. 지금껏 이토록 아름다운 밀밭을, 이토록 마음을 건드린 밀밭을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밀밭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밀밭의 냄새, 밀밭의 풍요로운 빛에 매혹되었다. 빵애 대한 언약이면서 동시에 평화의 반짝임이기도 한 밀밭. 그러므로 밀밭을 태우는 일은 밀밭 이상의 것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 밀밭 이상의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는 밀밭을 태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감동과 아름다움의 사물 중에는 언제나 빵이 들어 있었는데, 빵의 아름다움은 밀밭의 아름다움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바흐를 듣기 위해서 밀밭길을 따라 계속해서 갔다. ”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엄청나게 무모한 용기를 내어 마르틴 발저의 신간 소설 <불안의 꽃> 번역을 기획하게 되었다. 그전에 한 번도 본격적인 문학작품을 번역해본 경험이 없던 나에게 당시 발저의 언어는 너무도 현란해 보였다. 그 때 내 심장은 얼마나 떨렸던가. 마치 화산의 분화구로 뛰어들어가려는 사람처럼. 그런데 나는 원래 용감한 기질이 아니었으므로 더욱 겁이 났다. 나는 내가 결코 해내지 못할 것을 잘 알았고, 참혹하게 실패할 것을 분명하게 예감했다. 하지만 그때 내 안에서 나 자신을 향한 속삭임이 들렸다. ‘네가 정말로 재가 되어버려야 한다면, 그게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p.119-120   



“아침에 잠에서 깬 나는 가장 먼저 꿈을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다음 순간, 꿈을 완전히 잊는다. 극히 예외적인 일이지만 꿈을 기록하기도 하는데,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이다. 나는 부지런한 기록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록된 꿈은 기억에서는 사라지지만 편지의 형태로 남는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다. “꿈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 p.189   



멀리


„몇 년 전 카페에서 한 평론가가 말했다. „이 인터뷰를 위해서 오늘 아침 당신의 책을 읽었는데, 아마도 가장 자주 등장한 어휘가 ‚멀리‘인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정말로 멀리 간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어느 인터뷰에서, 글을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말이 ‚떠나다‘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가 항의했다.

나는 아니라고, 내가 글을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말은 ‚홀로‘라고 했다.“ p.209  





배수아의 산문집은 내가 독일에서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이다. 표지의 까만 숲 배경이 베를린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배수아의 첫 산문집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했는데 그의 소설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특히 소설 <검은 뱀과 물>에서 그는 꿈과 이어지는 연속적인 글쓰기를 했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가장 좋아하는 나는 그 책을 읽고 배수아와 같은 글쓰기,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fiction이 구분되지 않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이 책에서 그런 글은 ‘멀리’다. 나는 배수아의 단편 소설 중 <무종>을 가장 좋아한다. ‘멀리’는 <무종>과 많이 닮아있는 글이었다. 나는 글 초반에 나온 뜬금없고도 특징적인 주제가 글 마지막 부분에 은근히 스며드는 글이 좋다. ‘멀리’에서는 전체 맥락과 별로 상관이 없는 브라질이 그런 키워드다. 

이 글을 읽고 소설과 산문의 경계는 어디일까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소설, 산문, 수필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수능식 국어를 배우면 항상 글의 경계를 무 자르듯이 명확하게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산문과 소설, 에세이와 소설이 구분되지 않는 글들이 좋다. 스무살이 넘어 이런 취향을 발견했고 수능식 국어는 사실상 나의 취향과 독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베를린 이야기, 배수아는 베를린을 “내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시작된 도시”라고 말한다. 픽션 속의 인물일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배수아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하고만 대화를 나눈다. 내가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제일 좋아하는 소설과 다시 만난 것도 베를린에서였다. 마치 배수아가 베를린에서 <연인>과 재회하듯이. 배수아는 베를린을 언제고 떠나고싶다고 하지만 그 말은 마치 영원히 베를린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들린다. 나에게도 베를린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나는 필수 교육 과정의 학교 생활을 벗어나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이성애와 같이 전통이 지켜주고 사회가 조장하는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들의 방식이 있음을 배웠다. <작별들 순간들>은 나에게 그런 베를린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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