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린당나귀 Oct 08. 2021

헤테로 연애와 젠더 역할놀이

코로나 말고 유럽 독감이 유행한다는데 내가 감기에 된통 걸려버렸다. 뿐만 아니라 내 룸메는 이미 3주 전에 아팠고, 공작새 친구도 지금 아프다. 코로나로 감기에도 걸리지 않겠다는 긴장이 백신을 2차까지 맞았으니 풀어진 모양이다.


헤테로 연애는 소꿉놀이 안 같을 수는 없을까?

  분홍색 부엌에서 치키치키 요리하다가 ‘아빠 왔다’하면 저녁 차려서 같이 먹는 소꿉놀이. 아이들의 놀이에 사회의 욕망이 왜 이렇게 투영되어 있나. 소꿉놀이에는 꼭 이성애 정상 가족 엄마, 아빠, 아이들이 있어야 한다.

  헤테로 모노가미 연애는 당사자 둘이 아닌 제삼자와 같이하는 무언가가 생겼을 때 젠더 역할놀이 같아진다. 마치 소꿉놀이하듯이 공작새 친구가 오면 나는 당연하게 같이 요리하고 같이 치우고 같이 맥주 한잔 하는 cool girl이 되어버린다. 공작새가 나에게 소개해줄 마지막 친구가 와서 며칠 머물렀다. 원래 같으면 나랑 공작새가 ‚무언가 한국적인 것‘을 요리할 텐데 지금은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내내 라면이나 비건 소세지를 먹던 차에 무슨 손님 대접을 한다고. 공작새가 좋아하는 요리는 한번 시도해보고 손이 너무 많이 가 1년에 한 번 하기로 마음먹은 두부튀김에 버섯, 마늘, 당근을 오래 졸인 간장, 설탕, 고추장 소스 요리다. 베트남 친구가 처음 해줘서 알게 된 레시피인데 정말 맛있었다.

  이 요리를 하는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튀김이랑 전 요리를 정말 싫어하는구나!‘ 싫어하는 이유는 추석과 설날에 숱하게 했기 때문이다. 1년에 두 번은 혼자 전을 부치는 엄마 옆을 맴돌며 ‚내가 뭐 도와줄까 ‘하다가 도움은 안되고 위험하니까 거실에서 티비나 보라는 엄마 말을 듣고 안마의자에 앉아 티비를 봤다. 동그랑땡, 산적, 갈비 같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명절에만 먹을 수 있었다. 일 년에 두 번 삼일 내내 먹으면 물려서 나머지 시간에는 별로 생각도 나지 않는 음식들이다.

  전은 재료를 손질해서 속을 만들고 물기를 빼서 튀김 가루에 묻혀 잘 구워내는 과정이 복잡해서 싫기도 하지만 명절 음식이라서 더 싫다. 명절 음식이라 함은 착취로 만들어진 음식이다. 수없이 많은 여자들의 땀과 ‚내가 집에서도 안 하는데 왜 남의 집 바닥에서 이러고 있나 ‘라는 자괴감으로 이루어진 음식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직접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무런 각오도 없이 ‚두부 튀김‘에 뛰어들 때는 그 절차가 다른 전과 같이 진행될 줄 몰랐다. 하지만 하다 보니 끓는 기름 앞에서 두부에 밀가루 옷을 입히고 튀기는 건 나였고, 공작새는 옆에서 뒷정리를 했다. 공작새가 한다고 했어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위험한 기름으로 사고 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게 나았을 거다. 아무튼 그렇게 한 시간 반 요리를 하고 10분 만에 먹으며 ‚다시는 안 해야지‘ 다짐을 했었다.

  내가 한번 하기 싫다고 했는데도 공작새는 끊임없이 두부 튀김 요리를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 물었다. 마지막에 물었을 때는 약간 짜증도 났다. 그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내 손이 안 갈 수가 없다. 공작새는 두부 물기 빼는 법도 모르고 밀가루 옷을 신속하게 입혀 다른 두부들과 같이 기름 끓는 후라이팬이 재빨리 두부를 눕힐 줄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소스를 만들어 간을 봐야 할 테니 귀찮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마지막까지 싫다 하니 공작새가 비건 까르보나라 리조또를 만들어놓고 나를 불렀다. 그는 리조또 요리, 파스타 요리 등 유럽식 요리를 잘하는데 내가 까르보나라 소스를 먹고 싶다고 하니까 이 레시피를 찾아서 해주었다. 참 유사가 많아졌다. 유사 소세지인 비건 소세지, 유사 달걀 맛인 히말라야 소금, 유사 요거트인 비건 요거트. 유사만 오래 먹다 보니 유사가 오리지널 맛 같이 느껴진다. 얼마나 닮았는지는 오리지널을 다시 먹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므로.

  그렇게 저녁을 먹고 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생각났다. 사실 그날 내내 생각했다. 우리 연애에 남들이 끼면 우리는 젠더 역할놀이 같아진다는 걸. 나는 동양인 여성을, 공작새는 백인 남자를 수행한다. 제삼자의 시선이 끼어들 때부터 그렇다. 우리는 동양인 여성과 백인 남성 커플로 보일 뿐이고 그런 커플이 길거리에는 많다. 나의 눈에 들어오는 건 늙은 백인 남성과 그에 비해 너무나 젊은(어린) 유색인종 여성 커플이다.

  제삼자가 우리를 방문하면 더 강해진다. 나는 공작새의 친구에게 ‚공작새 여자 친구‘로 소개되는 것이고 그 출발점은 새로운 사람을 처음 만나 친해질 때보다 불리하거나 유리하다. 나는 왠지 재치 있는 쿨-걸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들이 자기네들 템포로 떠드는 독일어를 다 알아듣는 체해야 할 것 같다. 독일인 하나와 1:1로 독일어 하는 것도 불리한데 2:1, 3:1, 10:1… 은 더 불리하다. 아무튼 나는 이런 쿨-걸-동양인-여자친구 수행이 좀 지겨워졌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네 친구들이 올 때는 항상 우리가 같이 요리를 해서 대접했고 내 친구들이 올 때는 나랑 내 친구가 준비해서 너를 불렀더라? 좀 그런 것 같지 않아?

응 그렇네

내가 왜 네 엄마 아빠가 왔을 때 집에서 같이 요리하기 싫어했던 거야. 그건 여자 친구인 내가 그들을 대접하는 거잖아. 그래서 네 부모님이 왔을 때 나가서 먹거나 카페에 가는 게 좋은 선택이었어.

  공작새 친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대화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공작새는 우리가 그의 친구들을 ‚위해서 ‘ 요리한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요리한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요리는 그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동양인한테 고향 음식이나 새로운 소스를 기대하지 말아 주라 나 좀 피곤할라 그래.


  연애는 참여하는 사람이 만족하면 좋지만 연인 단위체로 만나는 모임이 많아지면 주변의 시선과 반응을 무시할 수가 없다. 나와 공작새만 있으면 도비는 공작새지만 누군가 우리 관계에 관여하는 순간 역할놀이는 손쉽게 바뀐다. 공작새 친구라고 맨날 보는 것도 아니고 나랑 공작새도 언제 남이 될지 모르는 사이인데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뭘 그렇게 남의 마음에 들자고 그 몇 시간의 소꿉놀이를 하고 앉았나.

  꿈에서 공작새네 집에 간 내가 약간 불리한 일을 겪었는데 그게 실제인 것 마냥 너무 생생했다. 나는 밥 먹는 자리이고 그래도 어른들인데…라고 생각하다가 결국 안 먹는다 하고 일어나서 나왔다.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설날에 전 부치던 앞치마를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 나와버리는 일.

  꿈 얘기를 듣고 엄마가 그렇게 언제든 그 상황에서 후회할 일 없이 참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그 후에 ‚어머님~ 기분 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땐 그랬어요~‘하는 거 말고.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는 되어있다.




                                                                                                                                                     2021.10.07

작가의 이전글 독일에서 겪은 인종차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