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회사는 놀이공원

신입사원 일기

by 레룬

1. 피곤하고 강렬한 기억


어떤 목적과 커리어패스를 염두에 두고 회사를 다니고 있냐 물어보면 그럴싸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는 있겠으나 정말 솔직하게 지금은, 그냥 재밌어서 다닌다. 재밌어서 굳이 별다른 결정이나 계획을 세워야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상방이 열려있고 즐거운 환경은 내게 옳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회사생활로 느끼는 즐거움은 희희낙락, 하하호호보다는 놀이공원 가는 날 느끼는 감정에 가까운 것 같다. 사실은 굉장히 피곤하고, 때때로 놀이기구 대기 시간만큼이나 지루하고, 날개를 펼친듯 짜릿함을 느끼는 순간은 겨우 잠깐이다. 놀이공원 간 날 대부분의 시간은 함께 간 지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지루함과 짜릿함 사이의 모호함을 지내는 일이다. 지칠 것을 알면서도 놀이공원을 찾듯이 회사생활도 그런 모순적인 즐거움이 있다.


"선명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있다고 해서 꼭 잘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 잘 살지 못했던 지난 날들에 대한 반성으로 새기게 된 마음이다. 그 뒤로는 매순간 존재감을 느끼며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내게는 호기심과 모험심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는 걸 알게 됐다. 다 둘러볼 수나 있을까 싶을만큼 흥미로운 기구들이 많고,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어 짜릿하고, 함께 모험을 감수하고 즐길 좋은 사람들이 있는 회사생활이 즐겁다. 매일이 웃음 넘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일 선명하다. 6년 전에 마지막으로 간 놀이공원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처럼.



2. 에피소드 자산


경험치, 다른 말로 크고 작은 삶의 에피소드들이 정말 큰 자산이라고 믿는다. 내가 나의 성장을 체감하는 유일한 방법이 현재의 나와 과거 에피소드들 속에서의 나를 비교해보는 것 뿐이고, 또 내가 겪은 에피소드들이 타인을 이해할 기본 재료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100% 공감할 수 없어 그나마 우리가 경험한 세계의 일부에서 남과의 연결고리를 만들며 살아간다. 나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남과 연결되는 감각으로부터 현명하게 살아갈 능력이 생긴다고 보기에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를 적립해나갈 수 있는 환경인가가 내겐 중요하다.


내가 말하는 에피소드란 내 정체성, 관점, 행동, 감정에 흔적이 남는 삶의 경험 단위를 말한다. 내 세계관을 비틀어보거나, 잠깐 멈춰서서 돌아보게 하거나, 강화하는 일들. 다양성과 자율성이 높고, 실패와 성찰이 허용되는 환경에서 많은 에피소드가 생겨나는 것 같다.


두 달 전에는 미팅에서 발언하는 게 두려워서 쩔쩔맸던 에피소드를 겪고 한동안 "Speak up"을 마음 속에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어제는 미팅에서 너무 신나게 "Speak up"한 나머지 잘못된 주제를 건드리고 괜한 오해를 만들어 미팅을 망쳐버리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내 영어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객관적으로 마주하고 깊은 부끄러움에 밤잠을 설쳤던 날이다. 오늘은 어제의 일이 매니저에게까지 전달되어 심상치 않은 호출을 받고 결국 미팅 중에 울어버리는 흑역사 에피소드를 만들었고.. 다시는 내 생각을 감정이란 도구를 빌려 전달하지 않도록 더더욱 커뮤니케이션을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에피소드를 쌓는 일은 혼란을 동반하지만 잘 소화해내기만 하면 자산이라고 믿으면서, 매일의 아프고 달콤한 자극들을 환영해봐야겠다.




호기롭게 시작한 이 열편의 신입사원 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할지 난감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과 다르게, 열편을 써내려가는 동안 나는 회사에서 웃는 시간보다 울거나 무표정으로 보내는 시간들이 더 많아졌고 잠시 퇴사까지 고민했었다. 글을 다시 손에 잡기까지 퀘퀘한 마음을 정제하느라 한 달로 계획했던 기간은 두 달이 됐다. 여전히 회사생활은 쉽지 않고 당연히 방황 중이다. 그럼에도 웃으면서 이 시리즈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건, 글을 쓰면서 내가 얼만큼 이 회사생활을 애정하는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오늘 적은 이 두가지 마음, 놀이공원에 가듯 출근하고 에피소드 자산을 부지런히 쌓아가겠다는 마음의 실천은 다음 시리즈 [오케이, 하나 배웠고!]에서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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