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일기
1. 워라밸은 모르겠고
워라밸, 자주 언급되지만 생각해보길 미뤄왔던 주제다. 워크도 모르겠고 라이프도 모르겠어서 워라밸까지 생각이 미치질 못했던 게 첫 번째 이유고, 내성적인 내겐 워크든 지인들과의 조크든 외부세계와 맞닿아 하는 일들은 모두 에너지가 드는 일이라 워크와 라이프의 구분이 썩 와닿지 않았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결국 본질은 내 에너지를 어떻게 현명하게 쓸지에 관한 질문이고, 고민의 필요성을 크게 못 느꼈던 주제다. 에너지의 유한성을 실감하는 빈도도 작았고 에너지를 쏟고 싶은 대상이 다양하지도 않았었다. 무식하지만 즐겁게 워100, 또는 라100 모드로 살아왔던 것 같다.
칼퇴를 권장하는 조직문화를 접하고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주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칼퇴에 대한 압박은 "이 정도는 이 시간 내에 해야한다"는 능력의 기준치가 암묵적으로 제시되는 거였고, 혹여 야근을 하게 되는 날이면 내 능력을 의심하면서 눈치를 보게 됐다. 자연스레 내가 가진 능력과 에너지를 극효율로 쓰며 살아갈 방법에 대해, 능력과 에너지를 어디에 쓸 때 가치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라이프와 에너지 관리'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 일부로 '야근'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정리된 것 같아 적어본다.
2. 억울하면 나쁜 야근
입사 후 6개월 동안 가장 크게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건, 자발적으로 한 일을 가지고 속으로 억울함을 쌓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건 어디까지 내가 '요구받은' 것이고, 어디부터 내가 '욕심내서' 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음에 기인한다. 내 입장에서는 노력을 한 없이 쏟아붓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얘는 뭐하고 있지 싶었을 거고, 결국 소진되는 기분과 억울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특히 여러 종류의 일을 다룰 때 빠지게 되는 함정 같다.
어쩌면 내 R&R를 잘 이해하기까지 반년이 걸린 것 같다. 해야 할 태스크들을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왔으나 그 비중을 잘못 파악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Comprehension & Training이 생각보다도 더 중요하게 요구되는 역할이었는데, Planning & Making을 크게 생각하다가 다른 부분들을 조금 놓쳤었다. 요구된 걸 잘 해내는 게 먼저인데 그 순서가 잘못되면 아무리 열심히 잘해도 공허함과 찝찝함이 남는듯했다.
1. R&R을 주관적 해석(X) 객관적으로 판단(O)한다.
- A: 50
- B: 30
- C: 20
2. 계속해서 눈에 밟히고 욕심나는 애정 태스크들을 살펴본다.
- C
3. 내 애정 태스크들을, R&R 이상으로 하는 건 늘 충만한 자발적 야근이다. 근무시간 내에 R&R 스콥을 잘못 채워서 하는 야근은 늘 찝찝한 야근이다.
- 근무시간에 A(50), B(30), C(20) & 야근으로 C(+30) -> 좋은 야근
- 근무시간에 A(40), B(30), C(30) & 야근으로 A(+10) -> 나쁜 야근
전부 내 영역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 흥미와 적성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손이 더 잘 가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근무시간에 모든 영역을 100으로 챙길 수 없기에, 요구된 걸 해내고서 더 욕심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회사 일이 아닌 내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어떤 보상을 바라지도 한 치의 억울함도 느끼지 않아야 한다.
3. 일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야근
근무시간에는 일을 해치우느라 바빠서 일을 잘 하고 있는 건지, 더 나은 방법은 없을지 되돌아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일하는 방식 자체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야근했을 때는 늘 만족스러웠다. 가령 반복 태스크들을 최대한 자동화해놓거나, 흩어진 문서를 단일화하거나, 리포팅 템플릿을 재구성해놓는 등 일의 틀을 손 봐놓으면 당장 다음날부터 너무 편하다. 숲을 보는 몇시간 남짓의 야근이 수십수백시간을 줄여줄 수 있다. 그렇게 평소 일의 퀄리티를 높여가면서 더 많은 근무시간을 내 애정 태스크들에 쏟을 수 있도록 정렬해갈 수도 있다.
4. 사실은 모든 게 간접적 야근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내 일은 결국 전부 사람, 말, 글을 어떻게 잘 쓸지에 관한 거다. 그걸 생각하면 회사 밖의 시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직간접적으로 회사 일에 도움되는 일이라 내겐 야근의 개념이 아주 희미하다. 지금처럼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것도, 독서나 유튜브 보는 취미를 즐기는 것도, 사람들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도, 그 속의 내용은 다르지만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들과 형태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모두 회사에서 발휘할 능력치를 높이는 노력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결국, 기분 좋은 야근을 위해서는 본인의 라이프에서 의미있게 여기는 것과 회사라이프와의 교점을 발견하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 같다.
물리적으로 회사에 있는지 회사 밖에 있는지가 구분될 뿐이지, 나는 그저 내 라이프에서 중요하고 재밌다고 생각하는 행위들을 하면서 눈 떠 있는 시간들을 잘 보내려 노력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합을 맞추면서 높은 생산성을 노력해야 하는 회사에서의 경험치를 빌려 회사 밖의 흥미로운 일들을 최대한으로 경험하고, 그렇게 얻는 흥미로운 경험들로 다시 순조롭게 회사생활하는 루프를 반복하고 싶다. 더 이상 야근이나 칼퇴라는 단어에 얽매이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드라이브와 능력을 응당 쓰며 살고 싶다. 그때 그때 내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대상들에 아낌없이 노력을 쏟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