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직을 결심합니다

신입사원 일기

by 레룬

오늘은 발리에서 달콤한 5일 휴가를 보낸 후 출근한 첫날이자,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뵀던 팀리더가 한국 오피스로 오셔서 첫 대면한 날이다. 그리고 약 두시간의 대화를 나누고선 앞으로의 회사생활은 이직 준비 기간으로 여기겠다고 마음 먹었다. 발리 휴양지에서의 행복한 기억들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너무 적나라한 현실이 눈 앞에 닥쳤다.


그간 온라인으로 소통해도 큰 문제 없었던 팀리더가 굳이 해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신 건 불편한 소식을 직접 말로 전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곧 바뀔 KPI의 방향성이 좋지 않다. 예고된 변화로부터 엿보이는 장기적인 방향성에 공감할 수 없고,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도 합리적이지 않고, 당장 눈 앞의 일들을 어느 장단에 맞춰 해내야 할지 불분명하다. 한 마디로 기여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난 프로젝트 담당자 자리에서 퇴출될 위기에 있다. 아마 12시간 뒤 내일 오전에 있을 삼자대면 미팅을 통해 어떻게든 결정이 날 것이고, 나는 할 말을 다 하겠노라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지만서도 어떤 결정이든 받아들이겠다는 체념의 상태다. 내 손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고, 아쉬움은 있어도 내 가치판단 하에 선택한 접근에 후회는 없다. 내게 내일 남은 일은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를 잘 묻고, 확신이 있다면 프로젝트 담당자 교체도 동의한다는 의견을 전달하는 일 뿐이다. 내 동의가 효력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만큼 나는 프로젝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그게 꼭 나여야된다는 생각은 이제 없다.


이직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여전히 나는 우리 회사가 "직장인"으로서 다니기 좋은 회사라고는 생각하고 "직업인"으로서 다니기에 아쉬운 부분이 많다. 조직 내에서 배정 받은 일을 수행해내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 타입이라면 문제 없지만 자기 일에 대한 소유권을 쥐고 일하긴 어렵다. 이직 여정은 "직업인"으로서의 고민을 심화하는 과정이 될 거고 아마 쉽진 않겠지만 기대도 된다. 지금껏 듣고 생각한 조각들을 메모해본다.



1. “Why do you keep overworking? Just finish your 8 hours and go home.”

완벽히 직업인이 아닌 직장인이기를 강요하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열정을 눈치보지 않고 일하고 싶다. 조직생활을 이어가는 이상, 나는 직업인으로 지낼 수 있는 조직에 속한 게 아니라면 금방 활력이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2. "The culture here? 1 person has to talk, 10 people only ask & listen."

업무구조, 문제정의와 해결방식이 협력 중심이 아니라 확인 중심이다. 한 사람한테 너무 많은 게 달려있고 해이가 발생하기 쉬우며 같이 사고할 사람이 없다. 질문, 지적, 확인이 집단사고의 비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직적인 환경을 어려워하는 건, 내가 직장에서 사고능력의 향상을 기대하기 때문인 것 같다.


3. "There's zero empathy, only numbers"

숫자가 과도하게 중시되니 지워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데이터의 함정을 경계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예쁜 숫자 만들기 놀이를 해야 하는 느낌이다. 숫자 뒤의 수많은 맥락들을 가장 가까이서 확인하게 되는 자리인데도 숫자 맞춰야 한다는 압박에, 숫자에 대한 반감과 씨름하게 된다. 숫자를 보되 매몰되지 않는 유연함을 갖춘 조직을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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