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교활한 어른

신입사원 일기

by 레룬

1. 이직을 결심한 다음날

퇴근하고선 밤 10시에 밖을 걷다 요아정을 사먹었다. 씁쓸한 마음에 괜히 사치를 부리고 싶은 날이었고, 딱히 대상도 효과도 없는 나만의 소심한 반항같은 거였다. 어려운 하루가 지나갔다는 안도감을 짙게 느끼고 싶기도 했고. 이래저래 마음이 뒤숭숭해서 안하던 짓을 하고 싶었던 날이다.


프로젝트 퇴출 통보를 받게 될 것이라 예상했던 미팅은 선명한 결론 없이 끝났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면한 건데도 이 미친듯이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은 뭘까. 최선을 다해 공격적이고, 방어적이고, 필사적으로 임했던 미팅이다. 그러니까 정당방위라고 판단하고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어쨌거나 가해를 했다는 데에서 오는 우울감인 것 같다.


프로젝트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표적이 되어야 하고, 그게 내가 되는 게 모양새가 가장 깔끔하고 예쁘므로, 사방에서 사냥 당하는 것 같았다. 여태 방어하는 데에 집중하다 도저히 사태가 안 끝날 것 같아 사냥을 시작해버린 게 오늘이었다. 데이터 뒤에 숨지 말라고 외치고 그쪽에도 귀책이 많다고 짚으면서 말이다. 서로를 그리 공격하면서도 서로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걸 안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고맙다는 마음을 주고받으면서도 이미 시작된 전쟁에 어떻게든 결론을 봐야해서 우리 모두 칼싸움을 성실히 지속하고 있는 거다. 취약성에 대한 인정과 연민이 사라져갈수록 폭력성이 짙어진다. 개인적으로도, 회사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이성적인 "이직 결심"과 억울함이 쏘아 올린 "때려치움"의 마음 사이에서 하루에 수십번 왔다갔다 한다. 노트북과 핸드폰 SNS 알고리즘은 순식간에 퇴사/이직 조언 콘텐츠로 뒤덮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복잡한 마음을 품고 출근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2. 이직을 결심한 다다음날

어젠 너무 감정적이었던 것 같다. 내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고 내 분노를 티내고 싶었다. 이성이 조금 돌아왔는지 오늘 들은 따끔한 소리 한 바가지엔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이직을 마음에 품고 다니기야 하겠지만 당장 당분간의 회사생활을 그래도 웃으면서 해나가기 위한 마음가짐을 정리하는 하루였다. 카페 문이 닫는 꼬박 10시까지 이렇게 진심 담아 조언해줄 선배동료를 만난 건 천운이다.


1) 지금 약점을 제대로 잡힌 상황이다.

그리고 회사생활에서 투명함은 중요하지만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다. 몇 안 되는 남은 시간동안 연약하지 않음을 사방에 필사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목적은 생존이다.


2) "레룬님이 교활한 어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 미성숙을 배려심 있으면서 정확하게 짚어주기에 완벽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중시하는 가치가 비슷한 선배동료와 교활한 어른의 태도를 학습하는 게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눴고, 처음으로 그게 유의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냥 장비 하나 습득한다는 느낌으로, 가면을 바꿔 끼워본다는 느낌으로, 한 번 교활하게 지내보지 뭐. 장비를 습득한 이상 내가 원할 때만 꺼내 쓰면 되는 거니까 말이다.


3) 적어도 상황이 풀릴 때까지는 신입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경험에 대한 생각을 잊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일단 기본적으로 회사에 부담을 주고 있는 존재이므로, 그 부담을 경감하는 게 단기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생존 전략이다. 젠장, 수직적 조직문화를 조금 더 일찍 이해했더라면 수평적으로 일하다가 이런 사태를 만들진 않았을 텐데.


4) 내게 달린 사람들이 있을 땐 그들을 생존시키는 게 내 생존이다.

그들을 생존시키지 않으니 나도 죽고 내 위에도 죽고 그 위에도 죽어간다. 매니지먼트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그리고 나로 인해 영향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5) 아무튼 내가 여기서 취할 것은 비즈니스 영어와 매니징 능력이란 필살기.

도움되는 것 하나 없이 운 안 좋은 상황인 건 맞지만, 내 효용이 분명하다면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6) 이상적인 조직은 없으며 어디부터 배부른 고민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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