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일기
여름에 입사했는데 반년이 흘러 한겨울의 크리스마스다. 연말 휴가로 조용해진 오피스 분위기를 탄 건지, 곳곳에서 들려오는 캐롤의 효과인 건지, 퇴사하고 싶어 들끓던 지난주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다. 한 번 마음속에 자리잡은 퇴사란 단어는 쉽사리 떠나지 않을 것 같지만 섣부르게 생각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마냥 괴롭기만한 것도 아니고, 잘해보고 싶어 아쉬운 마음도 남아있고, 복에 겨운 고민도 섞여있는 상태이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이 고통스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진 않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니까 눈 질끈 감고 3주만 용감하게 지내보자. 어떻게 흘러가나 봐보자.
1. 성장통 vs 나를 갉아먹는 고통
성장통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이 괴로움을 기꺼이 겪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억울함, 답답함, 지침, 막연함, 죄송함, 여러모로 괴롭지만 어쨌거나 근본적인 원인은 프로젝트 성과가 안 나와서 스스로 속상한 거다. 그걸로 가해지는 온갖 압박과 불편함은 부가적인 거고. 좋은 프로젝트 성과가 나왔을 시점에 난 그간의 과정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1) 내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모든 경험, 2) 경험 전후의 변화가 설명 가능하고 그 변화가 마음에 든다면 성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울고불고 분노했던 이 상황이 감사한 성장의 기회인듯도 했다. 가장 크게 달라질 것 같은 부분은 "확고함"과 "실행"에 강해질 것 같다는 점이다. 사실 살아오면서 크게 노력해본 적 없는 영역이다. 어디든 적응할 수 있게 주변을 읽으면서 스스로의 무색무취 유지하기를 노력해야 했던 지금까지의 생존방식과는 전혀 반대로, 확고한 결정을 내려 밀어붙여야만 생존할 수 있는 때가 왔다. 이 과정에서 너무 혼란스럽고 맞지 않은 옷을 입은듯 어색할 때도 많지만 왠지 겪어봐도 좋은 변화일 것 같단 직감이 든다. 3주 뒤 프로젝트가 안정화되었을 즈음엔 확고하게 밀어붙일 줄도 알되, 무식한 똥고집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바라봐줄 수 있길 바란다.
2. 실력에 대한 인정 vs 좋은 동료로서의 인정
회사 일이 잘 안 풀려 힘들었던 이번 경험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걸 알게 됐다. 많은 문제/아이디어를 발굴해 공유하는 데에서 재미를 느꼈고, 그게 내 실력을 발휘하면서 프로젝트에도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나 자주 동료들을 피곤하게만 만들었다. 그걸 할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력을 발휘하고 싶고 쉽게 드러내고 싶은 내 잘못된 욕심에서 비롯된 실수였던 것 같다. 정말로 인정받고 싶은 건 실력에 대한 게 아니라 함께 일하기 좋은 동료로서의 인정인데, 목적이 주객전도 되어 정작 중요한 걸 못 보고 있었다. 이번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지표를 먼저 챙겼어야 했고 그러려면 티 덜 나는 구석에서 조용하고 외로운 사투를 이어가는 시간을 늘렸어야 한다.
3. 실행자 vs 매니저
종합적으로 매니지먼트에 대한 이해가 약했던 것 같다. 내가 직접 실행하지 않은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게, 여전히 조금 낯설고 어렵다. 내가 직접 실행한 일이 프로젝트의 성과보다 더 크게 느껴져서는 안 되겠다. 프로젝트의 성공/실패가 나의 노력량과는 분리되어야 하고, 내 개인의 노력량을 줄이면서도 성과가 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걸 이해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려서 아직까지도 내 노력을 갈아넣고 있지만, 차차 구조를 잡아가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의 성과가 가시적이지 않을 때는 혼자만의 small wins를 인지하고 축하해주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안절부절할 줄 알았던 크리스마스날을 편한 마음으로 즐겼다는 데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브날 퇴근 직전에 받은 보쓰의 업무 요청을 크리마스 이후로 미뤄놓은 상태에서,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닌 해외 동료들의 업무 알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말이다. 막연히 스스로를 괴롭히던 상태에서는 조금 벗어난 것 같아 안도했던 크리스마스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