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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 Jun 08. 2022

가벼운 우울인줄로만 알았는데

조울의 기반은 우울

 최근 내 우울이 어느정도인지 궁금해서 가볍게 해본 심리검사(PAI: 전반적인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성격검사)에서 조증 척도가 높게 나왔다. 내가 한창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고 할 때 임상심리를 전공한 친구가 '매닉(manic, 조증의) 아니냐'고 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나는 우울증 관련 약을 5년이나 먹었지만 내가 정확히 무슨 효과가 있는 약을 먹는지 제대로 알아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리고 내 증상이 정확히 어떤 병에 속해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지금껏 그 어떤 의사도 내게 진단명을 말해주지 않았다. 물론 한번도 묻지 않은 내 책임이 크다. 진단명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병으로 관심을 끌려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묻는 것이 꺼려졌다. (생각해보면 배가 아플 때 정확한 진단명을 알고 싶어한다고 해서 누군가 나를 장염임을 명확히 해서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때문에 나는 내가 진단명을 내릴 정도까지는 아닌 가벼운 우울이나 기분부전을 앓고 있는 줄 알았다. 


 평소 다니는 정신과의원에 가서 선생님께 조증 척도가 높게 나왔다고 말씀드리니, 이미 내 진단명이 '양극성 정동장애'였단다. 


양극성 정동장애(양극성 장애, 조울증)는 이름 그대로 정동(감정과 정서를 아우르는 모든 것)이 양극으로 치닫는 것을 말한다. 흔히 기분이 좋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좋아져 '나 조울증인가봐' 하는 것은 양극성 장애가 아니다. 양극성 장애의 경우는 조증이 나타나는 기간과 우울이 나타나는 기간이 따로 있다(물론 섞여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우울장애는 유추하기 쉽고, 이에 대해 아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조증은 잘 알지 못하거나 그저 과도하게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아래에 진단에 필요한 증상을 간단하게 적어보겠다. 


 조증 삽화(episode. 개인적으로 삽화라는 번역이 잘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대충 '기간'이라고 부르겠다.)일 때는 다음 중 3-4가지 이상이 일정 기간 이상 나타난다. 그 정도가 비교적 약할 때는 경조증이라고 부른다. 언제나 정확한 진단은 전문가인 의사에게 맡기도록 하자. 

1) 자존감의 증가 또는 과대감

2) 수면에 대한 욕구 감소(예: 3시간만 자도 충분하다고 느낌)

3)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거나 끊기 어려울 정도로 계속 말을 함

4) 사고의 비약 또는 사고가 질주하듯 빠른 속도로 꼬리를 무는 듯한 주관적인 경험

5) 주관적으로 보고하거나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주의산만(중요하지 않은/관계 없는 외적 자극에 너무 쉽게 주의가 분산됨)

6)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사회적/성적인 활동) 또는 정신운동 초조(목적 없는 부산스러움)
7) 고통스런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활동에의 지나친 몰두(예: 과소비, 무분별한 성행위, 어리석은 사업투자 등)

[네이버 지식백과] 조울증 [bipolar disorder]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되면 증상을 끼워맞추기가 쉬워진다. 그리고 그만큼 병 핑계를 대기도 쉬워진다. 나는 그게 퍽 싫다. 실제로 내 무기력이 우울 기간 때문이더라도 나는 그게 내가 노력하면 해결 될, 내 의지의 문제 같았다. 그래서 병때문임을 인정하는 게 나약한 스스로에 대한 변명 같아 보였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증 기간이어서 넘쳐났던 활력이 내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병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면 한심스럽고 울적해진다.


 물론 이런 태도는 정신질환자의 주변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정신질환이 의지력이나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라 '질병'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정신질환자의 주변인이 첫번째로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분장애가 그렇다. 다른 질환에서는 망상, 환각, 폭력성, 현저한 집중력 저하 등 일반에서 크게 벗어난 증상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람의 기분은 정상 상태에서도 시시각각 변한다. 따라서 기분장애는 노력으로 해결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수 있는, '질병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작 정신질환자인 나조차도 '실은 의지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경조증 기간은 지난 3월쯤, 딱 한 번이다. 그 전에도 있었을지 모르나, 나는 자주 과민하고 짜증스러운 사람이었기에 그것이 조증인지 우울인지 그저 성격인지 잘 모르겠다. 

 위에 언급한 기간 동안, 나는 한번에 아주 많은 것을 하려고 했다. 신제품을 개발하고, 브랜딩 관련 책을 읽고, 사업 관련 강의를 들었으며,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기 위해 글을 짜내고, 야근을 밥먹듯이 하거나 집에 와서도 일을 했다. 아침잠도 많으면서 새벽기상 챌린지까지 시작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냥 열심히 사는 것'일 수 있으나, 하루에 한가지 일을 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평소의 나를 생각하면 굉장한 일이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해서 마음이 몹시 바빴다. 힘이 넘쳐 '조금만 더'를 속으로 되뇌고 있자면, 자는 시간이 몹시 아까웠다. 얼른 계획한 일들을 제대로 하고 싶어 초조했고, 몸이 달아 안절부절 못했다. 당시 새로 추가된 정신과 약 때문인줄 알고 복용량을 조절하기도 했더랬다. 

 이대로 가다가는 번아웃이 올 것이 분명해보였다. 번아웃이 올 거라면 오기 전, 컨디션이 아주 좋은 지금 하려는 일들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딱히 지친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가라앉았다. 일을 끝내고 와서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 게 버거워졌다. 낮에 열심히 일했으니 집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4월 말에서 5월까지 이어진 두번째 새벽기상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지나가버린 에너지가 퍽 아쉬웠다. 그 기간의 나는 멋진 사람이었는데, 왜 그 기세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우울이 찾아왔다. 4월, 5월에는 분명하게 죽고 싶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자살사고는 내 오래된 우울 증상 중 하나로, 이제는 익숙해서 별로 새롭지도 않다. 일하는 동안은 나를 다치게 할 방법만 생각했고, 집에 있는 시간에는 어떻게 죽는 것이 괜찮을지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몇 번이고 '오늘 죽겠다'고 생각했지만 자살하면 주변 사람이 나를 원망할 것이 무서워서 한심하게도 결단을 내려놓았다. 죽지도 않을 거면서 죽을 생각을 계속 하는 게 너무 지겨워서 죽고 싶던 중 심리검사를 하고, 양극성 정동장애 진단받았음을 알게 되고, 평소 먹던 우울증 약에 양극성 용 기분조절제를 추가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복약 3일째인 지금은 침대 밖으로 나가기 너무 힘들지언정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울이거나 조울인 우리는 일상과 증상과 복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내가 이상한 건 일정부분 병 때문이며,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나뿐은 아님을 기록하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이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날에도 억지로 밥을 먹자. 죽고 싶어 하되, 죽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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