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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봄 작가 Jan 17. 2023

아이와 미국에서 한달을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의 영유아기 육아 졸업과 동시에 다시 시작하는 모험과 도전을 위해 

곧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들을 위해 남편은 육아휴직을 하기로 했다. 직장에서 인정받는 직위에 있으면서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아이를 위한다기보다 엄마인 나를 배려한 이유다. 남매 쌍둥이를 키우며 7년동안 쉴틈없는 긴장감 속에서 육아를 해야했기에 번아웃이 찾아온 시기이기도 했다. 누가보면 나만 육아를 하는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학교적응이 우선이었던 나는 아빠와 육아휴직을 놓고 상의를 해야했다. 누군가는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지 않을까요? 이 시국에 누가 육아휴직을 하나요? 혹은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과 함께 육아를 한다면 부딪히는 일이 많아지지 않을까요? 걱정어린 질문을 받게 되지만, 남편과 나는 이것보다 더 중요했던 게 바로 아이와의 시간 그리고 가족과의 시간이었다. 





경제적으로 조금은 힘들겠지만, 그것보다 나는 육아에 있어 여유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3년간 쌍둥이를 낳자마자 아빠의 직장일로 중국에서 두 아이를 양육해야 했고, 처음하는 육아에 좌충우돌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쌍둥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내 체력에 비해 감당해야 하는 일이 많은 숙제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은 자기주장이 생길때면 엄마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보채기도 울기도 하는 날들이 많았다. 아빠가 직장에서 집에 오기전까지는 그야말로 두 아이를 데리고 독박육아를 해야했다어떤 날은 '나에게 육아가 맞지 않는건가?' '쌍둥이라서 내가 너무 힘든건가?' 라는 생각에 육아의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했다. 방법도 몰랐고, 아이를 바라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엄마도 처음인 내가 아이를 낳고 처음 육아라는 과제에 직면하고 부딪히는 것이었다. 한살, 두살, 세살 자랄떄마다 발달단계에 따라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 신비롭기도 했지만, 현실육아에 부딪히며 아이와의 관계속에 많은 씨름을 해야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아이와 좀 더 편안한 육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였다. 어차피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좀 더 행복한 육아를 하고 싶었다. 그것은 곧 아이의 마음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편안한 관계에 대한 갈급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두 아이를 동시에 키워야 한다는 것이 장점일수도, 또 단점일수도 있다. 나이는 같지만, 성별이 다르고 성향이 또 다른 아이들은 자기의 주장이 생길때면 엄마의 주장과 일치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로 나뉘게 되었다. 둘을 키우지만, 한명을 키우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것은 한 명은 내 마음과 같았기에 더이상 마음을 쓸 이유가 없었다. 집마다 아픈손가락이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하듯 우리 집에도 나에게 아픈 새끼손가락과 같은 아이가 있다. 


아무래도 기질이 좀 더 까다로운 아이는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나와 종종 부딪히곤 했다. 그 아이에 대한 숙제를 떠맡은 기분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 날 나는 그 아이의 내면이 궁금해졌다. 내 잣대와 기준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판단하지 않았는지.. 내가 아이라면 어떨까? 라는 생각으로 '왜 그럴까?'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생각은 나로 하여금 아이를 바라보게 해주었다. 아이를 혼내고 엄마의 이야기만 주장한다고 해서 아이와의 관계가 나아질리 없었다. 아이의 마음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서 나는 한발짝 뒤로하고 아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은 아이의 행동에 대해 평가하거나 제한하는 아닌,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했다. 매번 그러기에는 많은 훈련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아이를 관찰하는 방법을 통해 아이의 행동속에 보이는 이유를 차차 알게 되었다. 


"그만 울어! 정말 왜그래?" 라는 말보다 "더 놀고 싶었구나. 그래서 울고 있구나.' 라는 마음이 깨달아졌다. 깨달아지는 마음은 아이를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는 그런 엄마의 시선과 행동을 보며 자기의 감정을 조절하는 듯 보였다. 처음이었다. 기질이 좀 더 까다로운 한 아이를 두고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혼낼 이유가 없다고, 아이는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성숙한 어른과 미성숙한 아이가 삶을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가 누굴 가르쳐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착각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어른이기 때문에 내가 성숙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성숙한 아이를 계속 가르치려고만 한다. 사실 육아는 엄마와 아이가 삶에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시간이다. 엄마와 아이가 마주하지 않으면 절대 가르칠수도 성장할 수도 없다. 미쳐 깨닫지 못했던 아이의 마음이 궁금해졌고, 내가 어릴 적 받지 못했던 마음의 공감을 아이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그게 바로 '지금 이 아이의 마음은 어떤가?' 에 대한 물음과 시선이 바라봄으로 이어지게 했다. 


  



되돌아보면 아이와 7년간 영유아기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참 중요하다" 라고 느껴졌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이 함께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지금이라는 때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결단을 했다. 그리고 남편의 육아휴직과 함께 14시간의 시차가 나는 미국으로 한달살기를 떠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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