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우산

by 황혜림



비 예보가 없던 날이었다. 오후부터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졌다가 멈췄다. 젖은 공기는 밤까지 골목에 머물렀다. 자정을 막 넘겼을 때 문이 열렸다. 신발은 젖지 않았지만 발목에 물결 모양 자국이 있었다. 마치 물안개를 건너온 것처럼 걸음이 부드러웠다. 그가 말했다. “혹시… 우산을 빌릴 수 있을까요?” 이번엔 주문이 아니었다. 나는 우산 꽂이를 가리켰다. 손잡이가 나무인 오래된 우산 하나가 있었다. 그는 우산을 잡지 않고

한참 바라봤다. 손잡이의 나무결을 손가락으로 더듬듯 쓸었다. “이 모양… 우리 엄마 우산인데.” 목소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우산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고무 밴드가 약간 늘어나 있었다. 그는 밴드를 밀어 올리려다 멈췄다. “이거, 여기 있었어요?” “오래전부터요.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어느 날 우편함에 누가 놓고 갔죠. 유실물이라 생각했는데, 찾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에요.” 그는 우산을 품에 안았다.

우산을 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 쥐고, 펴고, 닫는다. 그는 품었다. 나는 물을 올리고 작은 잔을 데웠다. 오늘은 진한 아메리카노가 어울렸다. 흙내와 비 냄새가 섞인 공기에는 물맛이 단단해야 했다. 그가 자리에 앉았다. 말없이 우산을 무릎에 올려두고 천천히 폈다 접었다. 우산살 사이로 오래된 분홍색 천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얇은 소리가 났다. 그는 그 소리를 좇듯 말을 꺼냈다. “초등학교 때, 엄마랑 약속했어요. 우산 잃어버리면 우리 둘 다 비 맞고 집까지 뛰자고. 한 번 잃어버렸는데, 엄마가 진짜로 뛰었어요.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면서도, 약속은 약속이라고.” “그 다음엔 안 잃어버렸겠네요.” “아니요. 또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또… 나중엔 비를 맞아도 약속 얘길 안 꺼냈어요. 엄마가 힘들어 보였거든요. 그날 이후로, 저는 우산을 안 펴요. 비가 오면 그냥… 뛰어요.” 그는 웃었지만 숨이 떨렸다. 나는 잔을 밀어주고, 카운터 아래 서랍에서 얇은 금속 태그 하나를 꺼냈다. 오래전 이 가게 뒷방에서 찾은 것이다. “문턱 양산 & 우산 수선” 아마 이곳이 카페가 되기 전엔 우산을 고치던 가게였을 것이다. “이 태그, 보이나요?” 그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일하던 데 이름이 ‘문턱’이었어요. 우산 수선집. 이 글자가… 똑같아요.” 나는 태그를 우산 손잡이에 달아주었다. 금속이 나무를 살짝 긁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어디 계신가요?” “여기, 비가 그치면 알아요.” 나는 그가 잔을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마지막 한 모금을 남기고 일어섰다. 문 앞에서 멈췄다. “이번엔 펴고 갈래요.” 그는 우산을 폈다. 분홍 천이 바람에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며 종이 울렸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그는 우산을 쓴 채로 골목을 걸어 나갔다. 골목 모퉁이에서 누군가 그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나는 보지 않았다. 바람이 태그를 한 번 흔들고 멈췄다. 다음 날 아침, 카페 문 앞에 우산이 다시 세워져 있었다. 손잡이에 작은 쪽지가 묶여 있었다. “약속 지켰어. 이번엔 함께 뛰지 않아도 됐어. 나 이제 비가 와도 펴고 갈 거야.” 그 아래엔 작은 덧붙임이 있었다. “엄마는, 항상 여기 서 있었어.” 나는 우산을 가게 안으로 들여놓고, 태그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금속이 햇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 문턱을 넘는 일은, 가끔 우산을 펴는 일만큼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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