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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진 Jul 24. 2021

불면의 밤은 이렇게 흘러간다

Sailing in Silence 04. ondine

매일을 어떻게 잠드는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밤을 새우는 내게, 졸음이 밀려오는 순간은 골든타임과도 같다. 의식과 무의식의 애매한 경계에서 잠이 들랑 말랑 하는 중요한 순간. 이때 괜히 걱정거리라도 떠올렸다간 그대로 잠이 달아나고 만다.


아주 아주 얕게 잠들었을 때 울리는 카톡-소리나 벨소리도 숙면의 천적이다. 폭발적인 데시벨이 의식을 관통한다. 누가 내 귓구멍에 들어와 고막을 통째로 들어내어다가 스마트폰 옆에 옮겨놓은 것 마냥. 그렇게 되면 그날의 숙면은 포기해야 한다. 곧 책도 읽히지 않는 각성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불면의 저주에 걸린 좀비는  스마트폰을 붙잡고 킥킥거리거나 주전부리를 찾아 부엌의 찬장을 뒤져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다 새벽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나는 잠귀가 밝고 예민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빛과 소리가 없으면 잠들지 못한다. 잠자기 전 왁자지껄한 예능 프로그램이나 피아노 음악 같은 것들을 꼭 틀어놓는다. 수면등도 꼭 켜놓아야 한다. 어둠과 정적에 잡아먹힐까 무서운 쫄보의 밤은 휴대폰이 끊임없이 소음을 내뱉고 수면등의 노란 불빛이 침대 시트처럼 편평히 깔려 있는 세계에서만 무사히 흐른다. 불빛과 백색소음으로 단단히 울타리를 세운 쫄보의 밤은 안전하고 완전하다.


사실 예능 프로그램은 잠들 때 틀어놓기는 적절치 않다. 프로그램의 내용에 따라 그날 꾸는 꿈의 내용이 달라지고, 때로는 프로그램 안에서 출연자들의 목소리가 꿈속까지 들려 잠을 방해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며칠을  유튜브의 이상한 알고리즘에 따라 재생된 '무엇이든 물어보살' 프로그램을 틀어둔 채로 잠이 든 적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출연해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고 MC들이 고민을 듣고 해결해준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출연자들의 사연이 가정불화, 배우자의 외도 등 기구한 내용이 많았나 보다. 꿈속에서 남편은 나를 배신했고,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로 잠을 깼다. 분명 꿈을 깼는데도 분노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던 남편의 등짝을 후려쳤다. 남편이 돌아눕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하는 표정으로. 그리고는 다시 돌아누워 잤다. 그제야 나는 잠이 깼다. 죄 없는 남편의 등짝을 다시 후려갈기는 사이코패스가 될 순 없어서 그 뒤로는 절대 그 프로그램을 틀어 두고 자지 않는다.


수면용 음악으로는 클래식이나 피아노 음악이 적절하다. 음악은 얕게 잠든 내 영혼을 완전한 수면으로 깊게 끌고 들어가는 것으로 제 임무를 마치면 스스로를 조용히 음소거한다. 무의식의 영역까지 따라 들어와 꿈속 이야기에 마구잡이로 개입하는 월권을 저지르지 않는다. 설사 약간의 개입이 있다 하더라도 낮게 잔잔히 깔리면서 꿈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정도다.


그래서 나는 백색소음으로 유키 구라모토의 Sailing in Silence 앨범을 틀어둔다. 4번 트랙 ondine 이 흐를 때쯤이면 잠들 수 있다. 4번 트랙은 실제로 2000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가을동화의 삽입곡이기도 하다. 맑고 큰 눈에서 보석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배우 문근영의 탁월한 연기가 떠오르는 동시에 문근영이 연기했던 '은서'의 애처로운 눈물과 슬픔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곡이다.


감정이 촉촉해진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우아하게 잠들고자 한다. 목 늘어난 티셔츠와 남편에게서 뺏은 아디다스 반바지를 입고서. 5번 트랙의 음표들이 하나씩 꼬리를 떼어갈 때쯤 잠이 든다. 잠버릇도 좋지 않은 나는 잠을 자다가도 인간의 것이 아닌 말을 내뱉거나 이불을 돌돌 감아말거나 발길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잠을 깨어 괜히 화장실을 들락날락한다. 불안한 마음에 남편을 깨워본다. 남편은 잘 자고 있고 강아지도 무사하다.


완전히 깊은 잠이 든 후에도 나는 여전히 침대 이 구석 저 구석을 찾아 헤매느라 바쁘다. 눈을 뜨면 잠든 자리에 있었던 기억이 없다. 나는 대자로 뻗어있고, 남편은 넓은 킹 사이즈 침대에서 긴 팔다리를 착착 접어 넣고 구석탱이에서 움츠린 채 자고 있다.


불면의 밤은 이렇게 흘러간다. 오늘 밤도 왠지 잠들지 못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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