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위대한 수업] 미하엘 하르트만 <엘리트 신화의 종말>
'엘리트'란 어떤 사람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엘리트'를 권력이나 돈을 가졌거나, 특별한 성과를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라치트 밀스에 따르면 '엘리트'를 '자신의 결정을 통해 사회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위치의 사람'으로 정의한다.
가령 '축구의 엘리트는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우리는 축구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성과를 이룬 메시를 떠올린다. 그러나 엘리트의 정의를 다시 떠올린다면 축구 엘리트란 FIFA의 회장 같은 '주요 축구 기관의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이 게임의 규칙을 바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돈과 엘리트는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엘리트와 부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엘리트이면서도 부유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 부유하더라도 엘리트에 속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 가정에서 자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엘리트 가정에서 자녀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유산 상속만이 아니다.
첫째, 가족의 인맥. 그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누구를 접촉해야 하는지,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과 누구와 어떻게 교류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둘째, 아비투스(Habitus).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규정한 '아비투스'란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대화하고 어떤 관심사를 추구해야 하며 어떤 취미로 가장 빨리 타인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교육. 부모의 배경에 따라 어떤 가르침이 전수될 것인지도 결정된다. 독서에 관심이 많은 가정이라면 독서를 강조할 것이며, 영화에 관심이 많은 가정이라면 영화적 취향을 배우게 된다.
엘리트 대학은 모든 학생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을까? 미국의 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할 때 니드 블라인드(Need-blind)로 학생이 비싼 수업료를 감당할 수 있는지 심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학업 성적에 따라 학생을 공정하게 선발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입생의 소득 수준을 분석해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 선발 기준에는 학업 성적뿐만 아니라 인성 항목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성' 영역이 입학 기준에 포함이 된 것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의 엘리트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중고등학교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상류층 자녀들뿐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 난민이 유입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대인 학생 상당수가 지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콜롬비아 대학 신입생의 40%가 유럽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류층 학부모는 상대적으로 교육비가 비싼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으로 자녀들을 보냈다.
이러한 변화를 체감한 대학들은 입학의 필수 기준으로 전통적인 방식의 학업 성적 외에 '인성' 영역을 도입한다. 이로 인해 유대인 신입생 비율은 20% 미만으로 낮아졌고, 콜롬비아 대학은 미국 상류층 학부모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이제 인성 영역은 다시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이름만 변했을 뿐, 평가 기준이 유연해졌다는 것은 명확했다.
엘리트 대학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성공한 동문을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입학생 구성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가령 조지 부시 주니어는 고등학교 성적이 예일대에 입학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유력 정치인이었으며 철강과 은행업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이룬 집안이었기에 리더십 요건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있었다.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미국의 모든 엘리트 대학이 동문 자녀를 위한 특별전형을 시행하고 있으며, 장학금의 혜택 또한 소득 기준 상위 5% 학생들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이렇게 성장한 엘리트 계층은 각국의 정치, 경제계의 주요 인사로 성장하게 된다.
엘리트 대학이 없어진다면 이러한 현상은 해소될까? 엘리트 대학이 없다고 알려진 독일의 사례를 보면, 정부 구성원의 2/3이 일반인 출신이었던 과거와 달리 2000년대 메르켈 총리 이후에는 내각 구성원의 70%가 부르주아나 상류 부르주아 출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엘리트 대학이 없는 국가에서도 사회적 선별 메커니즘이 작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업에서도 이어진다. 기업의 CEO 등 고위직의 대다수가 상류층이기 때문에 채용 선발에 있어서도 자신과 유사한 지적 수준과 배경, 취향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엘리트 대학 졸업생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국가 엘리트 충원 방식이 배타적인 것은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 미하엘 하르트만은 사회적 출신 배경에 따라 엘리트들 간의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독일에서의 계층적 차이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최상층 가문의 엘리트들은 대다수가 사회적 차이가 성과의 결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답했고, 노동자 출신의 엘리트는 과반수 이상이 그 차이가 정당하지 않다고 답했다. 즉, 성장과정에서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고, 가족을 통해 많은 불공정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공해서 엘리트 지위에 올라갔더라도 대부분 그 경험을 잊지 않았다.
'더 많은 수업과 자산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상류층 출신은 증세를 반대했지만 노동자 집안 출신 엘리트는 증세를 찬성했다. 결정적으로, 증세에 가장 반대했던 사람들은 억만장자의 자녀들을 포함한 매우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소속 정당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사회적 출신에 따라 답한 것이다. 정치적 구성이 변화하고 그로 인해 정치 엘리트의 충원이 변화하게 되면 정치적 결정은 그 이전과는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전체 인구, 특히 사회적 부의 분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EBS 위대한 수업] 미하엘 하르트만 <엘리트 신화의 종말>
얼마 전,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2위가 의사라는 기사를 보고 씁쓸해졌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상당수도 의사를 꿈꾸고 있다.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들으며 우리나라의 의학계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농담을 던진 적도 있다. 그들이 의사를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단 의사결정에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느냐마는 속을 들여다보면 '주변의 권유로', '공부를 잘해서', '가업을 잇기 위해서' 등이 대다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씁쓸해진다.
부모로부터 받을 유산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엘리트 집단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영달을 취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나 스스로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모든 행동은 사회적인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주변까지도'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에게는 아비투스라는 장벽을 깨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인재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개천 용들이 나와야 한다. 공부가 지니는 힘이, 생각과 행동의 힘이 여기에서부터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