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 - 2021/3/20 첫 제출본
고등학교 가기 전까지는 항상 외톨이였다. 우리 반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투명한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 투명한 벽 안쪽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나는 바깥으로 발 딛는 법을 몰랐고 아이들은 어떤 분위기에 눌려서인지 그 벽 안으로 들어올 엄두를 못 냈다. 쉬는 시간 온 교실이 떠내려 갈 것 같은 속에서도 나는 조용히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었고 그럴 때마다 내 주위는 교실의 나머지 공간의 와글와글한 것과는 다른 차분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는데 점심시간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줄곧 먹어야 엄마가 싸준 큰 도시락을 겨우 다 먹을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정말로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는데도 밥을 다 먹지 못해서 남긴 적도 있었다. 거의 매일 밥을 혼자 먹었는데, 엉덩이에 닿을 만큼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땋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말갛게 생긴 여자애가 학급 맨 앞자리에 앉아서 점심시간 내내 잔뜩 집중해서 밥을 오물거리고 삼키고 오물거리고 삼키기를 반복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웃음이 풋 나온다. 귀엽기도 하고 왠지 좀 안쓰럽기도 하다.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노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는데, 워낙 구경꾼으로 지내는 게 익숙해서였는지 그 속에 끼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 애들의 대화에 아주 가끔 끼기도 했는데, 내가 입을 열면 순간 나에게 주의가 확 쏠리면서 주변에 있는 아이들의 주목을 끌게 돼서 아차 싶기도 하고 괜히 말 꺼냈다 싶기도 했다.
외톨이였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좁아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을 뿐이지 아이들이 나에게 나쁘게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체로 친절하고 또 그 또래 아이들 치고는 꽤 조심스럽게 대해 주었다. 이제 와서 다른 경험들과 굳이 비교해 본다면 주변의 외국 사람을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나는 아이들에게 낯선 존재였고, 나는 학급에 섞여들지 못하고 학년을 보내고 학교를 마쳤다.
이런 내 성격은 어른이 된 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아서 취미든 여행이든 산책이든 남들과 같이 하는 것보다는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은 1인 가구가 부쩍 늘어나면서 ‘혼술’, ‘혼영’, ‘혼밥’, ‘혼코노’처럼 앞에 ‘혼’을 붙여서 부르고 무엇이든 혼자 하는 게 자연스러워져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뭔가를 혼자 하는 것은 어디서든 이야깃거리가 되는 꽤 독특한 취향이었다.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평소에도 지쳐서 발이 끌리는 느낌이 들 때까지 걷곤 하고 여행을 가도 여기저기 걸어서 돌아다니길 즐긴다. 낮 시간에 가볍게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집 주변을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특히 좋아하는 것은 밤 산책이다. 낮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지만 한 손에 짐꾸러미를 챙겨 들고 다른 편 어깨에는 꽃무늬가 예쁘게 새겨진 핸드백을 메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아주머니도 있고, 방과 후 집에 가는 길인지 학원이라도 가는 길인지 비슷한 교복을 조금씩 다르게 차려입은 여학생 무리가 소리를 빽빽 지르고 박수를 치며 왁자지껄하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알록달록한 운동복을 차려입은 할아버지와 함께 나온 희고 털이 복슬한 강아지도 지나가고 왜소한 주인과 다르게 덩치가 크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개가 주둥이에 마스크를 쓰고 주인이 끄는 목줄에 끌려 지나가기도 한다. 낮에는 이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도로를 가득 채운 오토바이와 차들이 만들어내는 활기와 다양한 모습을 구경하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밤에는 사람들도 줄고 차도 줄어서 산책로를 내가 전세 낸 느낌으로 내 발걸음에 집중해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지방 도시에 있었던 우리 학교는 학생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넓은 학교 부지의 가장 안 쪽에 기숙사가 있었다. 학교의 정문은 도시 외곽의 순환 도로에 접해 있어서 학생들은 주말에 집에 가기 위해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을 갈 때나 정문으로 나갔고, 평소에는 대부분 쪽문을 통해 학교 근처의 동네로 나가서 밥도 먹고 만화방도 가고 술도 먹었다. 기숙사에서 쪽문까지 가는 길은 1.5km 남짓 되는 거리로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새벽까지 술이라도 먹는 날이면 쪽문에서 기숙사까지 오는 그 거리가 끝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여 엔드리스 로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나는 그 엔드리스 로드를 밤에 혼자 걷는 것이 무척 좋았는데, 엔드리스 로드는 가로등만 일정 간격으로 있을 뿐 주변이 인가도 없이 모두 논과 밭이고 기숙사가 아닌 다른 학교 건물들과도 거리가 꽤 있어서, 쪽문에서 기숙사로 가는 혹은 기숙사에서 쪽문으로 나가는 학생들만 간간히 오갈 뿐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그 길을 혼자 걷다 보면 주변은 칠흑같이 깜깜할 뿐 아니라 조용해서,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가로등 빛을 배경으로 일정한 속도로 터벅터벅 걷다 보면 나의 들숨 날숨과 발걸음이 묘하게 리듬감이 만들어냈다. 그럴 때마다 ‘이 길이 이름처럼 정말 끝나지 않고 영영 계속되어서 이렇게 계속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날은 혼자가 아니고 고등학교 동창인 남자애와 같이 엔드리스 로드를 걷고 있었다. 꽤 늦은 밤이었고 안개가 살짝 끼어서 어두운 주변과 뿌연 가로등이 대비가 되는 길을 둘이 별 말도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까만 아스팔트 바닥에 안개의 습기로 살짝 젖어서 반짝거리는 게 예뻐서 바닥만 내려다보며 한참 걸었는데,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니 친구의 손이 보였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손이었다. 왜 그랬는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갑자기 손을 뻗어서 친구의 손을 살짝 잡았다. 남자 여자 사이가 아닌 오래된 친구라서, 내가 갑자기 손을 잡아 놀라지 않을까 했는데 친구는 손에 힘을 꽉 줘서 맞잡아 주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어서 친구를 올려다보았는데, 키가 컸던 그 친구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미소 지어주었다. 친구의 머리 뒤로 가로등이 반짝였다.
그 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꼭 잡은 채 쪽문까지 걸었고, 그 길을 걸으며 나는 항상 내 곁에 함께 했던 친구들의 존재를 뒤늦게나마 느꼈던 것 같다. 내 친구들은 내가 만들어놓은 유리벽 바깥에서 나와 놀아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바닥만 보며 걷는 나의 옆에서 걷던 친구들이 그저 목적지가 같았던 게 아니라 나와 함께 걸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손을 잡아야 함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들이 그렇게 곁에 머물러줘서 나는 외톨이었지만 외롭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글쓰기 수업 첫 글로 제출한 에세이.
주제는 여행이었지만, 여행과 관련해서는 도무지 쓸 거리가 생각나지 않아서 며칠을 고민했다. 다행히 작가님이 여행으로 글을 쓰기 어려운 분들은 산책을 주제로 해도 괜찮다고 해주셔서, 평소 즐기는 밤 산책을 주제로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