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바닷가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검고 거친 표면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저 바다 건너 어딘가에는 희고 매끈한 바위도 있다고들 하는데, 이 섬의 바위들은 다들 검고 거칠었다. 검고 거칠은 몸뚱이가 자랑스러운지 부끄러운지 하는 생각도 없이, 바위는 바닷가 한 자리를 오래 지키고 서 있었다.
바위는 항상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바위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긴 세월이었다. 바위 앞으로 펼쳐진 바다도 바위 만큼 오래 거기에 있었지만, 바다는 항상 새로 태어나는 중이다. 그래서 바다는 기억이 없고, 바위를 기억하지 못 했다.
매일 바다는 힘껏 달려와서 바위에 부딪혔다. 까르르 웃으면서 소리쳤다. "안녕?"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뒷걸음질쳤다. 바위는 억울했다. 바다는 매번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매번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매번 그렇게 같은 인사를 하고서는, 매번 그렇게 도망쳐버린다. 바위가 ‘이번엔 꼭 대답을 하고 말테다’ 하고 단단히 준비를 해도, 바다는 찰싹 바위를 치고는 어느 틈에 도망가버린다. 바위는 오늘도 대답을 못한채로, 바다가 해를 먹었다. 주변이 깜깜해졌다. 어둠이 바위를 삼켰다.
어둠 속에서는 바위도, 바다도, 밤하늘도 한 몸이다. 어디까지가 바위인지,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구분이 안 된다. 밤에는 바다도 달려오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제 몸인지, 어디부터가 바위인지 알 수가 없으니, 밤에는 부딪혀오지 않았다. 대신 바다는 밤 하늘에 뜬 별과 달을 제 몸에도 잔뜩 그려넣고는, 기분 좋게 출렁이기만 했다. 바위는 밤이 되면 바다에게 말을 걸었다. 밤 바다는 기분이 무척 좋아보여서, 뭐라고든 대답을 해줄 것만 같았다.
"넌 왜 맨날 달려와?"
"넌 왜 내가 하는 말은 듣지 않아?"
"너 나 기억나지 않아?"
바다는 알듯 말듯한 표정으로 일렁거리기만 했다. 멀리 수평선에 걸친 달이 바다에 잠겼다 나왔다 했다.
"너 내 말 듣고 있지!"
"다 들으면서 안 들리는 척 하는 거잖아!"
바위는 답답함에 소리 질렀다. 바다는 잠시 잠잠하더니, 조용히 해를 뱉었다. 어둠이 바위와 바다를 갈라놨다.
바위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냐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를 알 법한 건 너 밖에 없는데, 나만큼 여기 오래 있었던 건 너 밖에 없는데, 너는 왜 '안녕' 이라는 말 만 하는 거야, 밤이면 서로 구분도 못 할 만큼 가까운 사이면서, 왜 내 말을 듣지도 못 하는 척 하는 거야, 무슨 말이든 좀 해봐.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지켜보던 바다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도가 점점 높아지고,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을 머금은 검은 파도가 바위를 쳤다. 바다 저 깊은 곳까지 휘저을 것처럼 큰 해일이 몰려왔다. 그렇게 밤새 폭풍우가 몰아쳤다. 쿠르릉 하고 땅과 바다가 흔들렸다.
'이상하다'
바위는 평소와 다른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아무리 밤새 비바람에 파도에 요동을 쳤어도, 해를 토하는 걸 까먹을 바다가 아니다. 바다가 해를 토하면, 날이 밝고, 날이 밝아지면 바위와 바다가 구분된다. 그런데 지금은, 바위와 바다가 구분되지 않았다. 날이 밝은데, 여전히 바위가 바다 중간에 있었다.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아 바다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게 뭐지..'
그런데다가 심지어 바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같은 목소리가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됐다. 물결이 일듯 잔잔한 목소리가 같은 말을 메아리처럼 계속 반복 했다.
'기다렸어' 기다렸어 기다렸어 기다렸어...
'아주 오래' 아주 오래 아주 오래 아주 오래...
바다는 바위를 품에 안고, 오래 오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계속 다시 태어나야 하는 숙명을 가진 바다가, 넓고 깊은 바다 전체에 바위에 대한 기억을 흩어서 지켜낸 이야기였다.
'너를 보러 갈 때는 내 기억의 일부만 가지고 갈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너를 꼭 봐야 한다는 것만 겨우 기억했어' 기억했어 기억했어 기억했어...
'너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너를 계속 봐야 했어' 봐야 했어 봐야 했어 봐야 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