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_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의 기록

by 루아 Rua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다.


해야 할 일은 있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미뤘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하고

쉰다고 말하기에도 어정쩡한 상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 하루는 실패였다.

할 일을 못 했고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쓸 만한 결과도 없었다.


그래서

괜히 더 바쁘게 굴었을 것이다.

미루었던 서류 작업을 한다거나

새로운 아이디어 실험을 한다던가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그래도 뭐라도 했다”는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침대에 조금 더 누워 있었고

창밖을 오래 봤고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늦게 밥을 먹었다.

핸드폰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날을

나는 정말 오랜만에 보냈다.


신기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덜 긴장돼 있었다는 점이다.

머릿속이 조용했고

자책의 목소리가

전처럼 크지 않았다.


물론

불안이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러다 뒤처지는 건 아닐까

익숙한 생각들이

몇 번이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해봤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라고.


잘못한 날도 아니고

망친 날도 아니고

회복한 날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이상하게도

그렇게 부르니

조금 편해졌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예전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늘

무언가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오늘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전히 여기 있었다.


숨을 쉬고

몸이 있었고

하루가 흘러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의 기록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일은

또 다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요즘의 나는

그 가능성 앞에서

예전만큼 겁먹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도

하루로 남길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