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몸처럼 영원히 함께 있었다면
연둣빛 떡잎은 세상을 먼저 보겠다며 다투고 두 갈래로 벌어졌다
우주의 영험한 기운이 하강하는 듯 올곧게 뻗어 내리는 4월의 빛줄기가 대지를 축복한다. 걱정이 없던 시절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호박 속을 파내면 씨앗이 신문지에 수북하게 떨어졌다.
어머니는 청둥호박 껍데기를 벗겨 길게 썰어 떡고물을 만든다며 줄에 매달았다. 심심풀이로 까먹던 호박 씨앗의 고소한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껍질이 단단하여 저장하기 편리했던 호박은 식량이 부족하던 시기에 가을부터 다음 해까지 우리 가족 식품으로 이용되었다. 어머니가 해주신 호박죽과 호박범벅은 최고의 음식이었다.
동네 앞산 등산로 산책 중에 무엇인가 떨어져 머리가 따끔했다. 머리에 떨어진 것은 상수리나무 우듬지에 매달려 있던 도토리였다. 작고 귀여운 도토리가 아니라 커다란 청둥호박이 떨어졌다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던가! 높고 튼튼한 나무일수록 열매는 작고, 낮고 연약한 호박 줄기에서 큰 열매가 열리는 이치에 조물주의 뜻을 다시 새겼다.
3월 초 옥토를 위해 텃밭에 두엄을 뿌려 비를 맞히고 바람에 말려 독성을 빼 순한 비료로 만든다. 비료에 독성이 빠지면 텃밭을 삽으로 뒤집어 봄볕에 말린다.
해마다 4월 말경 채소 모종 고랑을 내고 두둑에 비닐을 씌운다. 모종삽으로 검정 비닐을 푹 찔러 잠자고 있던 흙을 깨워 옆으로 밀쳐내고 작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아들이 모종 하나를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내가 주전자에 담긴 물을 구덩이에 가득 붓는다. 이번엔 내가 모종을 반듯이 세워 잡고 모종삽으로 흙을 퍼서 살포시 덮었다. 모종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나면 상추, 깻잎은 수확을 할 수 있고 고추·가지·오이·토마토에서는 꽃잎과 함께 튼실한 열매가 매달린다.
채소 모종이 끝나고 반나절 물에 불려 두었던 청둥호박 씨앗을 만져보았다. 물에 부른 껍질은 부드러워 금방이라도 싹이 움틀 것만 같았다. 껍질 속에 숨겨진 씨앗에서 어떤 새싹이 얼굴을 내밀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콩처럼 둥글지도 않고 납작한 타원형의 씨앗에서 어떤 원리로 늙은 호박이 열리는 것일까. 호미로 군데군데 땅을 파고 호박씨 뾰족한 부분을 밑으로 향해 묻고 호미로 흙을 살짝 눌러 갈무리했다.
씨앗을 묻고 2~3일 지켜보아도 변화가 없더니 일주일 만에 흙을 제치고 새싹이 올라왔다. 호박 새싹은 껍질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다정하게 지내다 세상의 빛을 보았다. 연약한 새싹이 온 힘을 다해 흙을 뚫고 올라온 모습이 의젓하다. 새싹은 얼굴을 세우고 당당하게 햇살을 받는다.
이틀 후 하나의 새싹이던 연둣빛 떡잎은 세상을 먼저 보겠다며 다투고 두 갈래로 벌어졌다. 두 갈래로 벌어진 떡잎은 서로 반목하여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서로 허리를 굽혀 등 돌린 떡잎은 싸워 토라진 것이 분명하다. 갈라진 떡잎은 서툴러 아직 양보와 배려를 모르고 미덕도 없다.
서로 다투고 화해하지 않고 고집부리던 새싹은 달빛에 홀려 밤을 꼬박 지새우며 한순간 꽃으로 피어나 크고 단단한 청둥호박을 맺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찾지 않던 텃밭을 닷새 만에 둘러보았다. 물을 먹지 못한 푸성귀들이 갈증에 시들하고 호박 떡잎도 아사 직전이다. 물 한 모금 달라며 애처롭게 쳐다보는 떡잎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조루에 물을 담아 듬뿍 주었다. 물맛을 본 호박 떡잎과 채소들이 살 것 같다는 듯 물을 단숨에 쭉쭉 빨아 당겼다.
생기를 찾은 떡잎은 폭풍과 뇌우에 견디고 천지를 뒤흔드는 번개와 천둥소리에 맞서며 줄기는 힘차게 뻗는다. 가을에 튼튼하고 실하게 열릴 청둥호박을 떠올리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호박꽃도 꽃이냐!’ 추녀를 보면 호박처럼 못생겼다고 빗대는 소리다.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다. 한 남자에게 ‘추녀’로 보이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는 최고의 ‘미녀’ 일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외모나 물질에서 끌리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움과 현명함의 내적인 매력은 외적인 요소 이상의 매력을 가진다. 추녀와 미녀의 편견을 가르는 잣대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
호박은 잘 익을수록 껍질은 반질반질하고 당분이 늘어나 단맛이 증가하여 과분(果粉)이 발생해 향내가 좋다. 껍질이 매끄럽고 윤이 나는 건 모종이 튼실하기 때문이다.
호박 씨앗이 한 몸처럼 영원히 함께 있었다면 새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 껍질 속에서 서로 견고하게 감추어진 모습만 고집했더라면 호박은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더러는 시기하고 투기하고 싸우며 힘을 겨루는 과정이 있어야 동반성장할 수 있다.
떡잎도 서로 반목하여 뒤돌아 경쟁하여야 열매를 얻을 수 있듯 세상의 이치 역시 시기와 질투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서로 반목하고 질투한다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자. 한마음이 되어 웃다가도 싸워 등 돌리고 그러다가 다시 마주 보고 웃기도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다.
달빛 품은 호박이 새근새근 잠을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