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307페이지, 오늘의 운세
간단한 사주 풀이가 우리의 마음속에 호응과 긍정의 감정을 불러오는 것은 풀이의 용어가 세부적이고 구체적이기보다는 매우 일반적이고 보편적임에도 불구하고, 占(혹은 운세)을 대하는 적극적인 감정이 풀이에 쓰인 차가운 언어를 구체적이고 따뜻한, 나를 위한 언어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또, 일요일 아침 목사님의 설교가 마치 나의 일(우리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나의 행위에 대한 암시처럼 보인다. 이것은 감정의 차원이며 질적인 차원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양적인 차원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사님이 설교를 위해 펼치는 성경은 인간 행위에 대한 다양한 도덕적 처방을 담고 있다. 방대한 도덕의 세부사항을 역사에서 펼치고, 또 부족한 부분은 목사님의 해설로 메워지며 확장되고, 또 듣는 사람의 감정에 의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확장된다. 성경은 이렇게 ‘세상만사’를 담을 수 있었고, 우리의 머리 위로 떠오를 수 있었다.
[특성 없는 남자]가 비록 1900년대 초(1차 세계대전 발발 전)라는 시간과 유럽의 변방 오스트리아를 무대로 하지만, 무질이 붙여가는 인식의 살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 보편으로 확장된다. 다양한 층위의 모든 고민을 담고 있는 무질의 서술은 많은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작은 세포 같은 인식과 사고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이 도덕의 다양한 층위를 담고 있다면 [특성 없는 남자]는 다양한 인식과 사고의 층을 다루고 있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사고와 인식조차 마지막에 가서는 마치 옆방에 있는 것처럼, 동전의 앞이 뒷면을 인식하는 듯한 놀라움을 만든다. 이것이 인간의 사고와 인식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렇게 세부적인 사고의 다양한 층위의 방대함은 결국 나의 현재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소설의 세부 구절이 현재의 다양한 인간들과 현상에 얻어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기화를 통해 우리는 [특성 없는 남자]의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인식과 사고의 틈을 구체성으로 메우게 된다. 모든 위대한 책은 자기화의 과정을 통해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