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460페이지
A가 생기고 이로 인해 B라는 대응이 있었고, B로 인해 C가 나타났다. 이것은 무한 반복일 수 있다. 반복이 가능한 것은 과정에는 행동뿐 아니라 감정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인과율에는 감정이 개입한다. 하지만, A가 완벽하다면(이후의 상황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이후의 과정은 소모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한 A를 찾는 것이다. 완벽한 A는 현재와 과거뿐 아니라 미래를 아우르는 예지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A는 신의 행위로 완벽하다.
아가테는 이혼을 결심하고(A) 하가우어에게 돌아가지 않는다.(B) 그리고 하가우어는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다.(C)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담백한 아가테는 편지에 당혹스러움의 감정과 A 결정에 대한 미숙함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통속 소설의 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플롯은 독자로 하여금 기대감을 부풀린다. 정연하던 감정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가테의 ‘샴쌍둥이’ 울리히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떻게 이 평범하고, 지극히 실제적인 감정과 행동을 비틀 것인가? 3권까지 읽어온 나의 무질은 울리히를 통해 분명 다른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기어오르던 플롯은 이제 변곡점에 도달했고, 여기서 그래프는 아래로 향하는 실망을 주던가 아니면 한번 더 도약하는 상승의 곡선으로 기대를 증폭할 것인가? 나의 기대는 상승이지만, 과연 이 상승의 에너지가 무엇이고 어느 정도의 세기로 표출될지 궁금하다. 외견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철학 소설이 그 어떤 통속적인 만화보다 더 큰 긴장을 만들고 있다.
모두가 A에서 멈춘 세상은 무엇일까? 천년제국이다. 모든 것이 예지 되고 모든 것이 원인이 되어 결과가 부재하는 세상. 감정이 실리지 않은 세상. 아마 울리히는 아가테를 다독이며 천년제국으로 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