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거점장으로 일할 때의 경험이다. 거래선과 업무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여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거래선의 현지인과 우리 지점의 현지인 간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때 나는 의도적으로 그 분쟁에 즉시 끼어들지 않는다. 이것은 책임 회피나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다. 만일 최종 의사 결정권자인 내가 직접 끼어들어 문제를 재단하고, 우리의 입장을 강변한다면, 우리에겐 퇴로가 없어진다. 이때 퇴로는 일정 수준의 완충 역할을 가진다. 만약 버퍼가 없다면 분쟁의 조정 과정은 ‘사즉생 생즉사’의 결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회사는 갑자기 존폐의 위기에 내몰릴 수도 있다. 일상적 비즈니스 상황을 모두 이런 백척간두에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 싸움이 부모의 싸움으로 번지는 것과 유사하다. 아이들의 문제가 부모로 넘어오는 순간, 고소/고발 혹은 칼부림으로 번질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버퍼를 떼고 상대를 향해 치닫는 듯한 느낌이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의 발가벗은 언어는 솔직하고 당당한 표현이라는 호응과 긍정의 반응을 얻고, 새 시대의(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가치로 대접받고 있다. 솔직함과 당당함은 사태의 해결에 대한 결의와 결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위신, 체면, 예의, 염치를 던져버렸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폭주하는 솔직함을 제어할 버퍼가 없다. 내용의 솔직함만이 중요할 뿐 그것을 싸고 있는 형식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개인 방송과 유튜브의 인기는 내용을 감싸는 형식의 안개를 걷었다. 우리는 알몸으로 세상을 대하고, 이젠 돌아갈 곳도, 관계에 대한 협상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딛고 선 폭신한 바닥을 스스로 없애버렸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은 기존 버퍼가 있던 자리에 욕망과 돈의 환영이 자라는 것 같다. 돈이 환영인 것은 실체가 아니라 지향점을 가질 수도 있는 의지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기존의 가치(위신과 염치등)를 대체하여 새로운 안개, 하지만 짙은 모래먼지 같은 것으로 우리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과 돈은 본질적인 만족불능으로 인하여 완성태가 아니라 지향태로만 존재하기에 사람을 뿌옇게 만들어 버리는 아우라, 환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은 양심과 염치와 같은 삶과 관계의 버퍼가 될 수는 없다.
산업혁명 시대 이래로, 기존 귀족들의 체면과 위신, 혹은 허세가 돈, 자본의 부르주아로 대체되었듯이 우리는 다시 한번 지독한 돈의 습격을 받고 있다. 이제 돈은 양심, 염치와 같은 도덕의 영역 – 시대의 어떤 변화에도 인간성에 끈끈하게 붙어있던 – 에 도전하고, 사람과 가치들의 분리를 도모하고 있다. 솔직/당당함은 이런 돈의 뱀 같은 스멀스멀한 움직임을 포장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아! 솔직, 당당함이 이데올로기인 세상이라니!) 우리는 정신의 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돈은 욕망의 구조화를 통해 이미, 그 합리적인 지평/ 당위적인 지평을 열었다. 그 금단의 문을 연 사람은 프로이트이고 니체와 같은 욕망과 의지의 철학자들이다. 소유의 바탕에 세워진 자본주의는 ‘욕망이 구조화’ 한 것이다. 만약 변화무쌍하게 꿈틀거리는 에너지로 욕망을 바라본다면, 의지 철학은 자본주의의 토대를 제공했다. 그래서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다’, ‘정당은 목적은 정권창출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용되는 것이다’와 같은 노골적인 주장들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니체는 자본주의의 부역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