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이야기 2
이제 두 번째 영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이다. 이 영화는 부제에서부터 느껴지듯 로맨스 장르이다. 다만 '어인'에 가까운 괴생명체와 농아인의 사랑의 모양이다.
우리는 물이 형상을 갖추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H2O 분자 모형을 내려놓길 바란다). 어디에 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물의 모양은 가변적이다. 로맨틱 판타지라는 장르를 생각하면 즉 사랑의 모양은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는 뜻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어느 정도 주제의식을 이미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한국어 부제 '사랑의 모양'은 한층 더 친절하다. 어쨌든 원제만으로도 로맨스 장르가 맞으니 겁먹지 말고 보라는 감독의 친절한 안내 같게도 느껴진다. 감독의 전작 <퍼시픽림>이나 <판의 미로>와 같은 영화를 생각한다면 이런 안내가 달가울 것이다.
전 글에서 만났던 운디네와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 엘라이자는 조금 간접적으로 인어공주인 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엘라이자가 좀 더 사람이라는 얘기다. 영화 초반부터 전설 속의 존재라는 것을 제시하는 운디네와 다르게, 엘라이자의 경우 말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으로 인어공주 모티프가 나타난다. 영화의 엔딩 씬에서 엘라이자의 목에 있던 흉터가 언어장애의 원인이 아닌 물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한 아가미로 보일 때, 엘라이자를 인어공주로 바라보게 되는 관객의 시선은 강화된다. 그 외에 이 영화를 동화의 총집합체로 만드는 여러 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지만 굳이 인어공주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60년대 미항공우주국이다. 1963년 미국에서 여성, 장애인, 정상 가족을 이루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21세기의 화면을 통해 관람하게 된다.
중년 남성(자일스)의 내레이션으로 엘라이자라는 인물을 소개하며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물로 가득 찬 방이다. 청록빛의 물에 둘러싸여 등장한 엘라이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계란을 삶고, 욕조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씻고 구두를 닦은 뒤 이웃인 자일스의 아침을 챙기고 출근한다.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엘라이자는 연구를 위해 NASA로 이송된 양서류 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괴생명체를 사랑하며 엘라이자는 죽을 위기에 처한 그를 풀어주기 위해 매우 용감한 결심을 하는데, 연구소에서 그를 탈출시켜 비가 오는 날 자연으로 되돌려주겠다는 것이다. 마냥 선하고 자기주장을 하지 않을 것 같던 엘라이자가 괴생명체를 죽이고자 하는 보안관리자 스트릭랜드와 대립 구도를 보이며 수화로 F-U-C-K-Y-O-U를 말하는 장면은 엘라이자의 안에서 촉발되는 짙은 감정을 보여준다. 탈출 계획을 세우며 이웃 자일스에게 도움을 구하는 엘라이자가 괴생명체를 사랑하게 되며 자신이 느낀 바를 전하는 장면의 간절한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이 영화에는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등장한다. 여성, 장애인, 흑인, 동성애자라는 소수자성을 가진 인물들이 엘라이자의 곁에 있으며 그들이 당연하게 차별받는 1960년대 미국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류성을 갖추지 못해 정상 사회의 이방인으로 보이는 그들은 같은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스트릭랜드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정상 가족'을 이룬 앵글로색슨 백인 남성으로, 엘라이자의 주변과 완전히 반대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작중에서 그는 만일 신이 있다면 나와 비슷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주류성을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그에게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뉜다. 미래와 과거. 미래를 이끄는 정상적인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열등한 사람. 그런 그에게 남미에서 포획해 온 괴생명체는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으나 결말부에서 그는 그 자신이 믿어왔던 '정상성'과는 완전히 다른 괴생명체를 마주하고 탄식 같은 한마디를 뱉는다. "오, 너는 신이군."
기예르모 델 토로는 판타지적인 요소와 동화적 문법으로 현실을 제시하는 감독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비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베일 씌운 현실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 아주 가까이 데려온다. 마냥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웃으며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다. 기에르모 델 토로가 내놓은 사랑에 대한 해석학에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또 다른 창작자로 안톤 체호프가 있다.
그 유명한 희곡 <갈매기>를 쓴 작가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인간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씁쓸한 어두움, 유머, 아름다움을 서술했다. 러시아 국민의 삶에서 가난, 질병, 정신적 정체를 포착하던 그도 의외로 사랑에 관한 여러 글을 썼는데, 그중 하나인 <사랑에 관하여>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So far only one incontestable truth has been uttered about love: This is a great mystery. Everything else that has been written or said about love is not a conclusion, but only a statement of questions which have remained unanswered. The explanation which would seem to fit one case does not apply in a dozen others, and the very best thing, to my mind, would be to explain every case individually, without attempting to generalize.
지금까지 사랑에 대해 언급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실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 사랑은 대단한 미스터리입니다. 사랑에 대해 쓰이거나 전해진 다른 모든 것들은 결론이 아니라, 답하지 못한 채 남겨진 질문들의 진술일 뿐입니다. 하나의 사례에 맞는 설명은 다른 여러 개의 예에는 적용되지 않고, 제 생각에는, 모든 사례를 일반화하려고 하지 않으며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입니다.
이미 <셰이프 오브 워터>라는 명작에 대해 많은 영화평이 쓰였고, 그만큼 영화학적으로 할 말이 많은 영화인 것도 알겠다. 나는 좀 뻔하지만 이 영화에서 개별적인 케이스로 보여주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프로이트는 정식분석학에서 사랑을 '대상의 재발견'으로 정의했다. 동시에 사랑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나르시시즘에서 온다고 설명한다.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상실이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관계가 형성된 후(소위 말해 '낭만적 사랑에 빠지는' 과정 이후) 사랑은 다른 형태로 승화될 수 있다고 저술하였다. 전형적인 서양 심리학에서의 사랑에 대한 담론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어쨌든 우리가 얘기하는 주제는 이거다. 이 이야기에서 엘라이자의 사랑은 어떤 결론을 맺는가?
언뜻 보기에 '주류', '정상성'에서 소외된 인간들의 집합소 같은 엘라이자의 세상에서 마냥 동화를 꿈꾸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엘라이자는 먼바다에서 온 이방인을 사랑하며 그녀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던 괴생명체를 그녀와 다름없는 존재라고 받아들인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성희롱을 당해도 아무 대처를 하지 못하는 약자인 엘라이자는 점차 괴생명체를 '그것(It)'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He)'라고 부르게 된다. 이런 과정은 동정과 공감에서 출발했겠지만 '그'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점점 그 안에서 완전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어떻게 엘라이자가 자신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괴생명체보다, 자신을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주류 인간들에게 더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엘라이자는 그가 엘라이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고 느끼며 불완전한 인간이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서 자신을 느낀다. 엘라이자는 그 앞에서 장애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랑 속에서 자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엘라이자는 이 생명체와의 교감을 통해 장애인, 고아, 하층민 계급이라는 비주류성의 틀에서 벗어나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찾는다. 마치 쳇바퀴 굴러가듯 똑같던 일상 속에서, 익숙해진 무시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매일에서도 잊지 않고 꿈꾸던 빨간 구두를 마침내 사 신는 것처럼. 1960년대 당시 곤두선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소수자성 따위는 핵무기와 공산주의자들의 습격 방어라는 '중요한 안건'에 밀려 가장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야말로 엘라이자에게는 쓸모없는 이념일 뿐이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오직 그 자신의 사랑과 괴생명체의 해방이다. 억압과 차별 속에서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던 사랑의 영역은 고난을 이겨내는 원동력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사랑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랑이 뭐길래 우리는 그토록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목매는 것인가? 이 영화의 제목이 말하듯 사랑의 모양은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 그토록 사실적으로 인간사를 조명하던 안톤 체호프마저 사랑에 관해서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음을 역설했으니 즉 사랑에 관하여, 우리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은 객관적인 관찰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엘라이자와 '그'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모습을 감지하고 그것이 다른 어떠한 감정과는 다른 것임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랑에 관하여>의 끝에서는 또한 이런 구절이 쓰였다.
I understood that when you love you must either, in your reasonings about that love, start from what is highest, from what is more important than happiness or unhappiness, sin or virtue in their accepted meaning, or you must not reason at all.
사랑을 할 때는 그 사랑에 대해 논함에 있어, 행복이나 불행보다도, 보통 의미로서의 죄나 미덕보다도 더 중요하고 가장 높은 것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어떻게 그런 괴생명체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관객의 반응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관객들에게도 영화의 끝에서 엘라이자와 '그'의 모습은 분명히 사랑하는 존재들로 보였으리라. 사랑의 주체에 상관없이 주체들 사이에서 확실히 사랑이 느껴지지만, 우리는 그게 '어떤 사랑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저 그대로 겸허한 자세로 이 사실을 받아들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 낭만적 사랑의 신비성에 대한 예찬이 과히 이어지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이 장르는 분명한 로맨스이고, 사랑에 대한 이 이야기는 본분을 충실히 다하고 있으니 그만이다. 우리는 또 다른 시간에 기존의 로맨틱한 사랑의 서사를 벗어나, 사랑의 재발명에 대해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잠시 물 속에 들어간 듯 멍멍한 사랑 안에서 헤매는 것을 허락하자.
사족.
30자 제한 걸려서 제목에 감독 이름 못 씀
글 중간의 <사랑에 관하여> 번역은 틀릴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