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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준맘 Aug 13. 2021

아빠와 나의 평행이론

두 아이의 여름방학이 끝나고 드는 생각

푸르스름한 기운이 올라오는 새벽 아빠가 나를 흔들어 깨웠.


잠이 덜 깬 상태로 시에서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에 끌려가다시피 갔다. 대충 아무 티셔츠나 주워 입고 따라갔는데, 뛰는 도중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2차 성징이 시작된 나는 티셔츠가 젖는 게 창피해 내내 티셔츠를 잡아 들고 뛰어야 했다.


'왜 잘 자고 있는 나를 여기 데려와서, 비가 온다는 예보라도 미리 알더라면...'


짜증을 속으로만 삼켰다. 완주는 했지만 가슴팍에 신경을 쓰느라 성취감은 느낄 수 없었던 그날,

내 목에는 참가상이었는지 유쾌하지 않은 메달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아빠는 2주에 한 번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가야 마음이 편한 분이었다. 심지어 나의 시험을 2주 앞두고도 그랬다. 나는 그게 늘 불만이었고 그 문제로 아빠에게 툴툴거리기도 했다. 뭐든지 대로 미리 해야 하는 나 최소 2주 전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했지만, 아빠는 늘 한 두 문제 더 맞히는 것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를 배려하지 않는 아빠가 야속했지만 내심 아빠가 어려웠고 아빠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물러섬이 없었기에 결론은 늘 아빠가 하자는 대로 되었다.


아빠는 방학이면 우리를 데리고 전국을 누볐다. 워낙 활동적이고 운동을 좋아하는 분이니 만약 우리 집에 아들이 있었다면 단단히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월급에 넉넉하진 않기에 교원 할인이 되는 숙소에 묵거나 텐트를 가지고 다녔다. 당시 나는 그런 여행이 설레고 감사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매 방학마다 치르는 이벤트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온전히 재생된다면 텐데, 기억은 늘 아쉽다. 남아 있는 사진들로 드문드문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나 똑똑히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달리던 차를 세우고 커다란 전국 지도를 펼쳐 보는, 수동 레버를 돌려 창문을 내리고 행인에게 길을 는 운전석에 앉은 아빠의 뒷모습이다. 웬일인지 그만큼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오로지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는 지금의 지도만 보고 낯선 곳을 간다는 건 각조차 못할 일인데. 그 모습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그때  눈에도 우릴 이끄는  모습이 대단게 보여서가 었을까.


대학교 때 밤늦게 도서관에서 나오면 그리스 신전처럼 펼쳐진 계단 아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리는 벌린 채 제대로 각 잡힌 자세"장윤희!!!!!"를 다.


멀리서 보아도 다부진 체격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를 듣고, 같이 나오던 친구는 "너희 아빠?" 하며 웃었다. 

공부가 잘 되었는지 저녁은 뭘 먹는지 다정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수고했어" 한 마디 하곤 벅뚜벅 차로 향하는 무뚝뚝한 그 시대 보통의 아빠였다.


아빠의 사랑은 그랬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자식에 그렇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 시절 두 딸은 아빠의 마음을 에 반도 몰랐을 것이다.




오늘 두 아들의 여름방학이 끝났다. 아이들의 등원 동시에 대대적인 청소를 하며 지난 3주를 돌아보았다.


나름 '엄마표 여름방학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최대한 코로나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붐비지 않는 자연으로.

파라솔을 사고 아이 둘 데리고 혼자 바다에 가는 무모했지만 뿌듯한 도전도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이다.


그렇다. 나는 아빠의 뒤를 좇고 있는 것이다.


이틀 전에는 동네에 있는 산에 올랐다. 몇 달 전 선선할 때 정상에 오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남편 없이 보기로 했다.


볕은 뜨거웠지만 무성한 여름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바람에서는 벌써부터 가을 향기가 났다. 그래도 여름은 여름, 이전보다는 힘든 산행이었다.

중도하산할 기회 몇 번, 그때마다 구원처럼 나타나 준 어른들의 응원으로 아이들은 힘을 냈다. 그리고 두 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첫째는 피곤했는지 바로 벤치에 누웠다. 자는 척인 줄 알았는데 정말 자고 있었다. 30여분을 자 아이를 간신히 깨워 하산했다.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아이 손을 번갈아 잡으며 끌어주며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아빠와 함께 오르던 산은 귀찮기만 했던 내가 아이들에게 먼저 산에 자 말.

아이들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놀랍게도 억해준다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엄마가 좋아서 그랬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바라는 건,

벤치에 누워서 맡았던 나무의 향기, 바람의 소리, 기진맥진 집으로 와 샤워한 뒤에 먹었던 주스 한 잔시원함과 달콤함을 몸과 마음 구석 어디엔가 직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데리고 다니던 아빠도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시험 문제 한두 개보다 할머니를 뵙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아빠,

엄마가 된 아빠의 딸은 6살 아들이 한글을 깨치는 것보다 영어 파닉스를 익히는 것보다 어디를 데리고 가서 어떤 경험을 하게 해 줄지에 관심이 더 많다.


자연으로 나가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 언제까지 이렇게 손을 잡고 다녀줄 것이며, 아이의 학업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 편히 다닐 수 있겠는가. 지금의 선택에 후회할지 모르지만, 아빠가 아빠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듯 나도 나의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려 한다.


모든 걸 기억하진 못해주 오래 부터 전해진 아빠의 사랑이 나의 오늘을 만들었고, 그 사랑이 내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지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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