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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Jul 02. 2024

해본 건 많은데, 제대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2편)

3개월짜리 인간...

한때 악기도 몇 가지 연주할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때는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다녔던 피아노 학원.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수요일마다 닭싸움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피아노 학원에서 닭싸움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땐 의문조차 없었다. 오히려 피아노에 흥미가 떨어졌을 때도, 닭싸움 때문에 피아노 학원을 계속 다니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아무튼 닭싸움 덕분에 나는 피아노를 꽤 오랜 시간 배웠다.      



믿기지 않겠지만 피아노 콩쿠르도 나간 적이 있다. 심지어 상도 탔다. 물론 당시 콩쿠르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참여한 아이들에게 꼭 멋진 트로피 하나는 쥐여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상이라면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다. 내가 받은 상은 누구나 주는 그런 상이 아니었다. 나는 무려 본선 진출까지 했다. 대회장을 한 번 더 가서, 연주를 한 번 더 했다. 피아노 선생님은 본선 진출을 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이 상처 입을까 걱정하셨다. 본선 진출한 사실을 다른 탈락한 친구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그 약속을 아주 잘 지켰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에서야 고백한다.



 나는 그렇게 최고상을 받았다. 다른 친구들의 네모난 트로피와 달리, 나는 동그란 트로피를 받았다. 누가 봐도 내 상이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피아노가 질려서 피아노 학원을 그만 다니고, 집 한구석에 피아노가 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치지 않았다. 키가 크고 한 살 한 살 늘어갈수록, 피아노 치는 방법을 잊어갔다. 피아노 치는 법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나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음악 실기 수업이 있었다. 교대 음악 강의실에는 책상 대신 피아노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피아노를 배웠다. 교수님 혼자서 30명을 가르치는 건 애당초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사실상 독학이나 다름없었다. 기말고사는 애국가와 동요 한 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다른 시험은 관심도 없었는데, 음악 실기 시험은 이상하게 잘 보고 싶었다. 한때 나도 피아노를 칠 줄 알았던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혼자 교대 음악 연습실에 들어가 열심히 애국가를 연습했다. 처음에는 삐걱대던 애국가가 나중에는 기름칠한 듯 부드러워졌다. 기다리던 기말고사 날 최선을 다해 연주했다. 성적은 B+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다시 서서히 피아노 치는 법을 잊어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피아노를 치지 못한다. 아. 사실 한 손으로 동요 ‘비행기’ 정도는 칠 수 있다.           





중학교 시절. 아이돌의 황금기였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포미닛 등의 여자 아이돌부터 빅뱅, 샤이니, FT아일랜드 등의 남자 아이돌. 당시 중학생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하나는 품고 살았다. 나 역시도 사춘기 시절의 열혈남아였고, 여자 아이돌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이유로 인해, 여자 아이돌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원인은 한 TV 프로그램이었다. 이름은 바로 ‘쇼바이벌’. ‘쇼바이벌’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다양한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 가수들에게 무대를 선물해주었다. 나중엔 꽤 유명해진 VOS, 8eight, 카라, 스윗소로우 등도 무명 시절 쇼바이벌에서 끼를 펼쳤다. 나는 그 중 ‘슈퍼키드’라는 락밴드에게 빠져들었다. 상큼하고 발랄한 그들의 편곡과 무대를 사로잡는 그들의 재치를 보고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로큰롤 스타가 될 거야!’      



안타깝게도 ‘쇼바이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안 봤다. 결국 시청률 부진으로 조기 종영되었다.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던 사람이 대부분이기에 정말 소리없이 사라졌다. ‘쇼바이벌’의 빈자리는 ‘공부의 제왕’이라는 프로그램이 차지했다. 한국방송, 서울방송이면 몰라도 ‘문화’방송에서 그러면 안 됐다. 그날 로큰롤 스타가 되겠다는 한 소년의 꿈은 짓밟혔다.      



그날 이후 로큰롤 스타보다는 공부의 제왕이 되기를 선택했다. 학교 가고, 학원 가고, 숙제하고, TV 보고, 중간고사 준비하고, 중간고사 끝났으니 놀고, 또 기말고사 준비하고, 기말고사 끝났으니 또 놀고, 이렇게 공부하고 놀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의 제왕이 된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음악을 했다면 로큰롤 스타가 됐으려나..


      

수능이 끝나고 억눌려있던 욕망이 표출되던 시기에 다시 로큰롤 스타의 꿈이 떠올랐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타고난 음치인 탓에 보컬은 글러 먹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피아노는 다시 처음부터 배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베이스 기타는 지방에선 알려주는 곳이 많이 없었다. 남은 건 기타와 드럼. 집 앞에 있는 실용 음악 학원을 찾아갔다. 문을 열자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가 들렸다. 그 울림에 심장이 떨렸다. 드럼을 쳐야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그 결정을 지금까지 후회한다. 그날 기타를 골랐어야 했는데….     



드럼은 정말 매력적인 악기였다. 처음 배울 때는 정말 재밌었다. 특히 심장까지 울리는 킥드럼 소리와 시원하게 울리는 심벌 소리가 좋았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락밴드 동아리도 가입했다. 무대에 서는 단 하루를 위해 계속 드럼을 쳤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드럼은 예술이 아닌 기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운 여름날에 땀 흘리며 연습할 때면, 내가 음악을 하는 건지, 운동을 하는 건지 헷갈렸다. 공연 연습을 할 때마다 생각했다. 

‘진짜, 이번 공연만 하고 그만해야지….’

하지만 무대에 서면 결심이 깨졌다. 한때 꿈꾸었던 로큰롤 스타가 된 기분. 엄청난 도파민이 분출되었다.      



그렇게 3년을 후회하고 기뻐하며 드럼을 쳤다. 4학년 때 공부를 핑계로 완전히 드럼 스틱을 놓았다. 졸업 후에 밴드 동아리 친구들과 연락이 자연스레 끊기자, 드럼을 칠 일이 전혀 없었다. 기타를 배웠다면 집에서 혼자라도 칠 텐데, 드럼은 그럴만한 악기도 아니었다. 다시 또 서서히 드럼 치는 법을 잃어갔다. 지금은 드럼을 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이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칠 일도 없는데….          






내가 악기만 했을 것 같은가? 운동도 상당히 많이 했다. 운동은 싫어했지만 운동을 배우는 것, 운동을 경험해보는 것을 좋아했다. 헬스 pt도 받아보고, 역도 수업도 들어보고, 크로스핏도 하고, 복싱도 배우고, 주짓수도 배우고 이것저것 안 해본 게 없다. 이것저것 찔러보지 않고, 한 가지만 꾸준하게 했으면 뭐라도 좀 잘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나와 함께 헬스를 시작했던 친구는 나와 비교할 수 없게 근육질이 되었다. 나와 함께 주짓수를 시작했던 분들은 사범을 하시는 분도 계시다. 한때 나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분들이 저 높은 곳에 가 있는 것을 보면 허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랴…. 이게 나인걸.


     

아내는 나를 보고 이런 별명을 붙여주었다. 

“3개월짜리 인간.”

그 별명을 부정하려 애써봤지만, 늘 실패했다.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개월짜리 인간이란 것을.

왜 나는 3개월만 지나면 모든 것이 지루해지고, 또 다른 일에 관심이 생길까.

정말 이상할 노릇이다.


      

아내는 늘 말한다. 

“달리기도 이제 질릴 때가 됐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 달리기는 질리지 않는다.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재밌다. 좀 더 잘하고 싶고, 더 좋은 기록을 세우고 싶다. 물론 이제 나는 나를 믿지 않기에, 이 생각이 얼마나 갈진 모르겠다.

이제 나조차도 궁금하다. 

나에게 달리기는 몇 개월짜리 취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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