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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둥산 Oct 08. 2021

3. 암 수술보다 힘든 것

젊은 암환자의 병원 일기 1


나는 4 26 난소 1진단을 받고 정확히  달만인 5 26일로 수술 일정이 잡혔지만 수술의 범위에는 2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전 절제, 두 번째는 부분 절제이다. 전자는 가장 교과서적인 범위로 양쪽 난소를 포함한 난관, 자궁 등 생식기능을 모두 제거. 그렇게 되면 완치율은 높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됨과 동시에 조기 폐경이 되어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한다. 후자는 예후를 보장할 수는 없지만 한쪽  난소와 자궁을 남겨 가임력을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겨둔 한쪽 난소에서 생성되는 여성호르몬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


의사 선생님이 선택지를 준다는 건 좋은 신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장담은 할 수 없다. 전이가 있다면 선택지는 없고 전 절제로 수술하는 것이 살길이다. 따라서 근종 제거 수술의 조직검사로 1기 말임을 진단받았지만 다른 장기로의 전이 여부가 걱정됐다. 다시금 초음파, CT촬영, PET 촬영 검사로 전이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결국 난소암은 수술과 조직검사를 통해 최종 병기를 알 수 있게 된다.(그래서 본 단계의 수술을 ‘병기 설정술’이라고 한다.) 나는 되도록 왼쪽 난소가 멀쩡하다면 근종이 있었던 오른쪽 난소만 제거하고 싶었다. 주치의 선생님께는 가능하다면 가임력 보존술로 수술해주십사 뜻을 전했다.


 입원 준비

수술이 잡힌 일주일 전부터 회사에는 휴직 신청을 냈다. 주말 전에 코로나19 PCR 검사에서 음성 결과를 받아 두어야 입원이 가능했다. 검사를 마친 후에는 만약을 대비해 집에서만 지냈다.


입원은 수술 이틀 전인 5월 24일에 했다. 오전 9시에 자리가 났다는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 일주일 가량 5인실에서 초면인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아침이었다.


필자와 비슷한 수술 예정이라면 입원 물품으로 추천하는 2가지가 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머리를 감지 못할 수도 있으니 가루 샴푸(파우더로 기름기를 잡아준다), 수술 후 분비물이 많을 수 있어 성인용 기저귀 혹은 입는 타입의 오버나이트 생리대를 챙기도록 하자.



수술 전 날

입원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3가지는 끊임없는 검사, 불면, 배고픔이었다.

 

첫 번째 검사는 위, 대장내시경. 입원한 날부터 곡기를 끊어야 했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맛없는 관장약 500ml짜리 4병을 연거푸 마셨다. 안 그래도 잠자리를 타는 성격인데 늦은 밤과 다음날 아침까지도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빈 깡통이 된 몸으로 내시경 검사를 하러 갔다. 그런데 웬걸. 자리가 모자라서 수면마취로 위아래를 한꺼번에 해줄 수가 없단다. 그래서 위 내시경은 오전에, 대장 내시경은 오후에 나눠서 하게 됐다. 아침엔 수면마취를 했기 때문에 검사를 했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그러나 오후에 대장내시경을 할 때는 의식이 깨있었다.

 “욱..!”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대장 내시경 중이었다. 대변이 마려워 배가 아픈데 그 강도가 상상 초월로 세다고 하면 어떤 느낌인지 연상이 가능하다. 어찌나 아프던지 신음소리를 겨우 참아냈던 기억이다. 내시경 검사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다음 순서는 심전도 검사였다.

“으…”

의료진이 초음파 기계로 내 왼쪽 가슴을 후벼 파듯 눌렀다. 내 심장을 보는 건지 유방을 보는 건지 헷갈릴 만큼. 빨리 끝내고 싶어서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꾸욱 참았다.


그렇게 너덜너덜 해져서는 내 침대로 돌아오니 그때부터는 배고픔과의 사투가 시작됐다. 다음날 수술을 위해서 내 뱃속은 텅텅 비워져 있어야 했다. 휴대폰에 퇴원하면 먹고 싶은 음식들을 하나 둘 써보기 시작했다. ‘치킨, 떡볶이, 돼지갈비…’ 머릿속에 온통 자극적인 음식들 생각이 가득했다. 빈 속에 어지러울 수 있으니 간호 선생님이 포도당 수액을 놔주셨다. 종일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먹방과 음식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들만 찾아봤더니 음식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저녁이 되자 전공의 선생님이 나를 데스크 안 쪽의 컴퓨터 앞으로 부르셨다. 내일 있을 수술 동의서 작성을 위해 수술 내용을 설명해주셨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명해드렸다. 복강경 수술로 시작하지만 상태에 따라 개복 수술로 전환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단다. 십 여장에 걸쳐 수술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오만가지 합병증, 부작용이 끊임없이 쓰여있었다. 무서운 내용들이 많아서 내가 꺼림칙해하니 선생님은 너무 염려 말라고 위로해주셨다. 0.1%라도 생길 수 있는 증상들에 대해 고지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적혀있을 뿐, 정말 드물게 나타난다고. 애써 나한텐 나타나지 않을 증상들이려니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확률에 대한 생각은 이제 그만 하고 싶다. 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수술 당일 날

대망의 수술 날. 이 날 내 수술은 두 번째 순서. 들어가기 전 남편이 면회를 왔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남편은 안쓰러워했고 나는 배고프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아침 10시경 내 차례가 왔다. 파란색 수술복과 위생모자를 썼다. 너무 가벼운 재질이라 입은 느낌도 들지 않았다.

수술방에 들어가기 전, 간호조무사 분이 나를 휠체어에 채워 수술 대기실에 데려다주셨다.


 “오늘 어디 수술하시나요?”

의료진 분이 앉아있는 환우 순서대로 질문하여 확인했다.


 “오른쪽 난소 절제 수술해요.”

확인이 끝나면 이동식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이동한다. 천장 형광등이 한 개 두 개 지나가는 걸 보다 보면 수술 대 위의 조명에서 멈추게 된다. 수술 베드로 몸을 옮겨 누웠다. 서늘한 공기와 엄청나게 밝은 조명 빛을 받고 있어선지 이곳이 천당과 비슷할까 싶다. 정확히는 그 전 단계 일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심판을 받으러 온 배고픈 영혼이 된 기분이다.


이제 나 정말 수술하는구나. 다시 깨어나면 어떤 몸이 되어 있을까. 수술이 커지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걱정들이 머리를 지나가고 남편, 부모님 얼굴도 떠오른다.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내 주변에서 의료진 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수술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산소마스크 같은 것이 내 얼굴에 씌워지고 약품 냄새가 나는 가스가 숨으로 들어왔다. 들리던 소리가 작아지고 의식이 멀어져 갔다. 수술대 위에서의 풍경 감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환자분! 환자분! 배 아프신가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식이 돌아와 있을 때 나는 벌써 내 침대로 돌아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3시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복실에서 못 깨어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근종 제거 수술 땐 소변줄과 피주머니를 달고 있었는데 이번엔 소변줄만 달려 있었다. 내 두 다리엔 공기압 마사지가 감겨있고 조였다 풀어졌다 작동하고 있었다. 수술 후 혈전이 생길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인 듯 보였다. 배를 슬쩍 들춰보니 드레싱용 밴드가 붙어 있었는데 통증은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음… 아직은 괜찮아요.”

 “진통제 들어가는 속도 조절하실 수 있으니까 통증 참기 힘들어지시면 이 버튼을 누르세요.”

 수액 걸이대에 못 보던 기계가 하나 더 걸려 있더라니 진통제였다.

 “8시간 동안 물 포함해서 금식하셔야 해서 물 묻힌 거즈 입에 물려드릴게요. 건조한 게 덜 할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거즈를 입에 물고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휴대폰을 들춰보니 남편이 주치의 선생님께 들은 수술 결과 내용을 문자로 남겨주었다.


수술은 다행히 복강경으로 시작해 복강경으로 끝났고 왼쪽 난소 및 자궁도 멀쩡했다고. 암세포가 잘 숨어있는 경우가 많은 맹장과 대망 조직 일부도 제거해주었다고 한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맹장 터져 고생할 일은 없겠다고 수술이 잘 된 것을 마음속으로 자축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금식 때문에 말할 힘도 없었다. 저녁이 되니 어김없이 식사 시간이 왔지만 밥 냄새만 킁킁 맡으며 누워 있었다. 옆 자리에 계시던 선배 환우 분이 커튼을 열어 내 안부를 물어주셨다.

 “좀 어때요? 어떻게 젊은 새댁이 들어왔나 했더니 수술도 금방 하고 오더라고~”

 “네(웃음) 다행히 수술은 잘 됐나 봐요. 아휴 이제 좀 긴장이 풀리네요. 근데 배고파 죽겠어요. 지금 3일째 금식 중이라…”


병실 안에는 필자처럼 난소나 자궁암 쪽의 환자들만 모여 있어 모두 여성분들이었다. 나이는 모두 50대에서 60대 후반으로 보였다. 자식들을 다 키워내신 어머니 뻘 되시는 분들이었고 꽤나 긴 입원 생활을 하시는 듯 보였다.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힘든 정도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털어내면 아무것도 아닌 상처, 비슷한 아픔 앞에 서면 차라리 가벼울 수도 있는데…… 상처는 내보이면 더 이상 아픔이 아니다. 또 비슷한 상처들끼리는 서로 껴안아줄 수 있으니까. 얘기 끝에 서로의 상처를 상쇄시킬 수도 있다. 같은 값을 지워나가듯 그렇게 상처도 아문다.’
- 양희은, <그러라 그래> 중에서


병실 안에서 선배 이모님들은 서로의 통증을 물론 본인의 처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들 하셨다.


어떤 분은 방광에도 암이 퍼져 자가 배뇨를 못해 기계로 소변을 뺄 수밖에 없다는 얘기부터 또 어떤 분은 임파선을 상당부 도려내 몸이 자꾸만 퉁퉁 붓는다는 얘기 등등. 누가 더 아픈지 겨뤄보자고 하는 대화는 분명 아니다. 서로의 처지를 말하다 보면 통증이 경감되는 효과는 물론 마음의 위안을 가져갈 수 있다.


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귀동냥하며 불행의 모래사장에서 작은 다행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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