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암 환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들
암 환자의 몸은 병원에서 치료해주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정신과를 병행하는 환우들이 많다고 알고 있다.
암의 종류, 기수와는 상관없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공포감과 좌절감은 우울과 불안으로 이어진다.
수술과 항암을 하는 동안 처음에는 많이 불안했다. 모든 조치를 취해도 결과가 좋을 것인지 아무것도 확실한 그림은 없었기에.
복직은 언제쯤 할 수 있을는지부터 이런 저질 체력을 가지고 일반 사회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우울하고 불안한 생각이 드니 불면으로 이어졌다. 눈을 뜨면 해가 중천인 생활을 몇 주째 반복했다.
내 마음의 병을 키우지 않기 위해 무언가 해야 했다. 그래서 내 나름의 노력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정서관리 1: 진정한 휴식
누구든 암이 아니더라도 살면서 죽고 싶은 때가 있다.
초등학생 때었다. 아파트에 산 적이 있었고 18층 즈음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부터 인가 부모님은 매일 술에 절어 집에 왔고 심하게 싸웠다. 그런 밤마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발코니 창 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다. 바닥엔 개미처럼 작아진 사람들이 보였다. 그 바닥으로 투신하는 상상을 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온 세상이다. 그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며 감당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자살은 매일 밤 내 상상 속에서만 행해졌다. 그러기 엔 죽음 자체가 더 무섭다.
그런 날이 이어지다 두 분은 이혼을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활달하고 밝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괜찮은 척을 했다. 큰 상실감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알면서도 외면했다. 그럼에도 덕분에 일찍 철이 들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이렇게 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떠올렸다.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잘’ 살고 싶었다.
이혼 후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과 단칸방과 반지하 월세를 전전하며 살았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자식들을 길러냈다. 대학에 합격해 내 나름의 자력으로 졸업했고 작은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그 뒤로는 독립해 중곡동의 옥탑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조금씩 돈을 모았다.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해서 진짜 흙수저인 나의 가슴에 비수로 꽂힐지라도 나는 무엇하나 포기하기 싫었다. 남들 버는 만큼 벌고 싶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싶었다. 취직과 연애를 거의 동시에 시작해서 7년 남짓한 시간을 고군분투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국이지만 20년에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전세로 작은 신혼집을 얻었고 새 살림살이를 채우며 행복했다. 그리고 결혼 1년 만에 암 진단을 받았다.
힘든 어린 시절을 겨우 지나 성인이 되어서는 먹고 사니라 매일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허덕였다.
이제 좀 살만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고생 끝에 낙은 오지 않고 암이 왔다.
세상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이 통탄할 결과도 그냥 오진 않았겠다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쉴 줄 몰랐던 나에게 억지로라도 잡아서 눕히려는 것 아닐까. 하물며 기계도 기름칠해주고 정비를 해주는데 그동안을 나를 돌보지 않았다.
4년 가까이 디자이너로 일을 했던 첫 회사에서는 거의 매일 같이 야근을 하며 다녔다. 박봉에 몸이 축나는 것 같아 돈이라도 많이 벌고 싶어 광고회사 기획직으로 이직을 했다. 광고주의 데드라인에 모든 스케줄을 맞췄다. 철야도 불사했다. 바쁜 시기엔 새벽 네다섯 시에 퇴근해 그날 아침 아홉 시 전에 회사에 나와 일을 한 적도, 주말 출근도 물론이었다. 뒤쳐지는 것이 불안해 틈틈이 영어공부와 자격증을 따며 자기 계발도 했다. 바쁜 업무들로 꽉 찬 TO DO LIST에 산부인과 검진은 당연히 없었다.
매달 심한 생리통이 올 때마다 진통제를 하루에 여섯 알씩 먹어가며 참았다. 밀려오는 잠은 하루에 커피 서너 잔으로 매몰차게 쫓아버렸다. 매일 퇴근하고 집에는 잠만 잘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식사도 하지 않고 맥주만 연거푸 마시다가 곯아떨어졌다. 건강에 좋을 만한 일을 내 몸에게 해주지 않았다.
몇 년 동안의 과로는 만성피로가 되었고 호르몬 불균형으로 이어져 내 면역체계를 무너뜨렸을 거다.
난소 근종은 무지막지하게 크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방치한 셈이다.
이를 무시한 결과가 난소암으로 왔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결론이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계속 120퍼센트 출력 상태로 질주하면 어느 순간 반드시 다 소진되고 만다. 그러고는 폭삭 주저앉는다. 한 번 소진된 에너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아는가? 뭘 위해 그렇게 열심히 달렸는지 잊어버릴 만큼 오래 쉬어주지 않으면 회복되지 않는다.’
-임경선, <월요일의 그녀에게> 중에서
회사를 다니는 동안, 물론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멈춰서 생각해보니, 나는 분명 회사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조직 안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좋고, 프로젝트를 완수해내어 갈 때의 성취감은 마음을 벅차오르게 한다.
이제는 정말 건강한 사람이 되어서 건강한 회사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정말 쉬어보자. 앞으로 더 건강한 사람이 되어서 그 전처럼 빌빌 거리며 다니지 말아 보자.
그렇게 내 몸은 온전한 휴식과 케어가 필요한 때가 온 것이리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정서관리 2: 암밍아웃
수술과 항암을 위해 일반 세상과의 격리를 시작했을 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두려웠다. 겉으로는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아픈 사람으로 낙인찍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장애물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걱정이 들었다.(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모조리 걱정하는 타입)
‘건강 관리를 얼마나 못했으면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나’
최근 젊은 암 환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신문기사에서 암 환자에 대한 편견을 읽었다. 병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저렇게 생각한단 말이야? 충격이었다. 내가 암 환자라는 사실로 나를 판단할 것 같다는 무서움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젊은 환우들이 몇 년이 지난 후 관해 판정을 받았을 때 비로소 암 경험자임을 밝히는 사람들이 꽤나 보인다.
반면에 유튜브나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투병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약간의 배려가 필요할 뿐이지 남들과 다르지 않음을 증명했다. 편견을 보기 좋게 깨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에 내 아픔이 전보다는 한결 가벼워 보였다. 무엇보다 암 환자인 것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도 저들처럼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처음엔 아주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소식을 전했다. 친구들은 아파야 쉴 수 있는 너 답다며 평소 회사 일에만 매달리던 나에게 쉬어주지 않으니 몸에서 준 신호라고 입을 모았다. 그중에서도 힘든 대학시절을 함께 지냈던 친구는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데 중병이 온 것에 한탄하며 전화로 눈물을 흘렸다. 같이 고생한 시절이 떠올라서인지 나도 울컥했다.
어쩌다 연락이 닿은 전 직장 동료에게도 본의 아니게 병에 대해 밝히게 된 적도 있었다. 공감능력이 탁월한 나는 이럴 때 상대방이 할 말이 없겠다는 것 까지 생각해 건강 전도사 라도 된 마냥 화재를 빠르게 전환했다. 무증상 이어도 어서들 병원 가서 검사받아보라 독려했다. 유방암 홍보행사를 하는 이 들의 심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가늠해본다. 병에 대해 말을 던진 순간에는 나도 상대방도 무언가 어색하다.
그럼에도 말하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몇 안 되는 내 친구들과 동료들은 현명하다. 나에 대한 연민을 과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얼토당토않은 위로의 말을 늘어놓지 않아서 좋았다. 투병 후 직장생활을 잘 해내는 주변의 사례들을 실어 옮겼다. 그런 그들의 담백한 응원 메시지와 선물이 많은 힘이 되었다.
양가 부모님께는 수술 날짜가 잡힐 즈음에야 어렵사리 말씀드렸다. 친정아버지는 속으로는 한 없이 걱정이 많은 타입인데(이걸 물려받아서 나도 무지막지하게 걱정이 많다.) 겉으로는 무조건 괜찮다고만 하는 사람인 걸 알고 있어서 비밀에 부쳐야 하나 고민도 잠시 했던 게 사실이다.
“아빠, 오늘 좀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난소에 혹 제거 수술했던 거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정말 미세하게 암세포가 발견됐데. 그래도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보통 말기라는데 나는 1기에 발견된 거라서 하늘이 도왔데요! 수술은 한번 더 받아야 하지만 유명한 병원에 교수님 찾아 놨으니까 걱정 하나도 안 하셔도 돼요~” 나는 별거 아니라며 평소보다 더 씩씩한 소리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종합보험을 얼떨결에 들어 놨던 게 딱 하나 있었는데 그걸로 병원비도 걱정할 게 없지 뭐야. 건강보험공단에도 중증환자 등록돼서 5%만 자기 부담하면 된데요. 암 걸리면 돈이 제일 문제라 하던데 그것도 옛날 이야긴가봐~”
얻어걸린 거면서 준비 잘해 둔 척도 잊지 않았다.
“그래. 수술이랑 치료만 잘하면 되겠네~”
아버지는 애써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셨다.
시댁에는 도저히 내가 먼저 운을 뗄 수가 없어 남편이 시어머니께 먼저 전화로 언질을 해두었다. 딸처럼 대해 주시는 시부모님이지만 며느리가 손주 보여 드릴 수 없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먼저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내 걱정을 들으시더니 아이는 하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절대 마음 쓰는 일 없었으면 하셨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알리면서 ‘아픈 나’를 당당하게 인정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찜찜하고 숨기는 듯한 기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정서관리 3: 치유의 독서와 글쓰기
독서와 글쓰기가 좋은 이유.
독서는 영감을 주고, 글쓰기는 내 안에 있던 널브러진 생각들을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수술과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서는 매일 내 상태를 관찰하는 일기를 쓰고 있다. 인터넷 카페에 해당 차수가 끝날 때마다 정리해서 후기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내가 처음 암 진단을 받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다른 이들의 후기에 의존해 이것저것 준비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정성스럽게 글을 올렸다. 댓글로 많은 분들이 감사의 말을 전해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기 효용 감이었다.
글을 자주 써 보던 사람도 아니고 글재주가 없다고 생각해 미루기만 하다가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래와 같이 일련의 독서들을 통해서다.
첫 번째, 나는 개인적으로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태도에 대하여>를 몇 년 전에 읽고는 특유의 시니컬한 문체와 정곡을 찌르는 내용들이 좋아 여러 번 다시 읽곤 했다. 작가님은 갑상선암 투병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고 했다.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밥벌이로 시작한 일이 지금은 직장경력 보다 더 길게 이어지고 있다고 한 것에 감명을 받았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것이 나에게 분명 활기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로 암세포가 점령한 몸을 치료할 순 없었지만, 몸 안에 갇힌 불안한 마음은 다독여 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치유의 글쓰기’가 이런 걸까? 그럴지도.’
- 이연,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중에서
두 번째, 이연 작가님의 책을 읽었다. 유방암 투병기 안에서 그녀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 아픔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수 있다. 미래는 누구나에게 불투명하고 말하는 그녀의 글에 더 이상 앞으로의 일을 불안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저자가 그러했듯 나 또한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인생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수신지 작가님의 만화 ‘3그램’도 읽었다. 나와 같은 난소암을 27살의 어린 나이에 앓았던 저자의 실제 투병일기는 먹먹함 그 자체였다. 일반 사회에서는 쉽사리 내비칠 수 없는 감정들을 두 작가님은 각자의 글과 그림에서 마음껏 펼쳐내었다. 그것은 가슴이 탁 트이는 창구가 된다.
암 환자 임을 밝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나도 매우 불편하다. 하지만 흰 화면은 말이 없고 얼굴도 없다. 내가 눈치 보며 배려해줘야 할 대상도 아니니 일방적인 생각들을 마구 쏟아내 볼 수 있다. 내 머릿속의 생각을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이 정리된다. 마치 행복해서 웃을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기보다 웃어서 행복해진달까.
사족.
나는 투병생활을 시작하며 결코 끊지 못하고 하루에 한 잔으로 줄인 것은 다름 아닌 커피. 세상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커피는 내 맘대로 되는 유일한 것이라서 포기할 수가 없다.
회사 다닐 때는 출근길마다 별다방에 들려 커피를 픽업하거나 사무실에서 커피 머신을 연신 눌러대던 나였다. 에스프레소 추출액이 컵에 채워지며 퍼지는 고소한 내음부터 이미 황홀하다. 날마다 시간 대 별로 마시게 되는 종류도 달라진다. 아침엔 본격적으로 업무에 돌입하기 전 두유로 변경한 카페라테를 마시면 정신도 번쩍 드는 것 같다. 두유로 출출한 속도 든든하다. 점심 식사 후는 식곤증을 타파하기 위해 가볍게 아메리카노를 들이켠다. 정신없이 일에 쫓기다 늦은 오후가 되면 떨어진 당을 올려 보겠다고 달달한 간식과 함께 또 한 잔. 하루에 서 넉 잔은 거뜬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하루 한 잔은 괜찮다 했으니까 말을 잘 듣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 맘대로 기록하며 고소한 커피 한잔을 즐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