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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둥산 Oct 08. 2021

5. 언젠가 널 만날 수 있을까

젊은 암환자의 수정란 냉동 일기


암센터에서 난임센터로

나는 4월 26일에 난소암 1기 진단을 받고 한 달 만인 5월 26일 날, 부분 절제 수술을 받았다. 왼쪽 난소와 자궁은 남겨두는 ‘가임력 보존술’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몸으로 깨어났다.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둘 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있다. 신혼을 충분히 즐기고 싶었고 아이는 서두를 것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막연히 언젠가는 아이가 생기리라 생각했다. 역시 인생은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린 보통 수술하고 항암은 3주 뒤에 들어가. 그 사이에 내가 알려주는 난임 센터 가서 난자 냉동을 알아봐요. 전화해보니까 그 정도 시일이면 충분하다고 하네”


암 수술 다음 날 아침 회진 시간 때 주치의 선생님께서 나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난임치료로 유명한 병원 선생님의 이름을 알려주셨고 나는 그 길로 망설임 없이 전화 예약을 했다.


서둘러서 알아보라고 하셨던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항암제로 인해 난소 기능이 떨어져 강제 폐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남겨둔 자궁이 있어 시험관 시술이 가능할 터이니 ‘총알’을 준비해둬서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난자 혹은 수정란 냉동 기법이 항암을 앞둔 환자를 위해서도 개발되었다고.


그러나 과배란 유도 주사를 맞고 시술도 받아야 하는 일이었기에 난소 과자극 증후군 등 후폭풍을 겪을 각오를 해야 했다.


 “주사도 많이 맞아야 하고 부작용도 있어서 힘들다는데 괜찮겠어?”

남편은 수술이 끝나자마자 또 고생을 시작하려는 나를 걱정했다.


 “사실 나도 내가 정말 아이를 원하는지 잘 모르겠어.”

나는 남편의 걱정을 들으며 고백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하늘의 뜻으로 알고 우리 둘이서 재미있게 살아나가자고 얘기한 적도 있었다.


 “그럼 더더욱 냉동하는 게 필요할까. 육아는 남자가 할 수 있지만, 임신과 출산은 오롯이 여자의 몫이잖아.”

 “그렇지. 나 밖에 못하지. 그런데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

암 진단을 받은 이후 TV에서 아기가 나오면 일순간 무척 슬퍼지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단순히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을까 봐 겁이 나서는 아니었다.


그렇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던 나는 난임센터를 다니기 시작했다.


‘암환자가 이렇게나 많다고?’

처음 암센터에 갔을 때, 환자와 보호자들이 뒤엉켜 대기석이 모자랐다. 엄청난 환자수에 진료 시간은 항상 밀려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을 더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난임센터에 처음 갔을 때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난임 부부가 이렇게나 많다고?’

정말 많은 여성들 혹은 부부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유명해서 다들 여기로 오나 봐.” 병원 대기시간에 지친 남편에게 머쓱하게 얘기했다.

이 날은 교수님과 첫 상담일이라 남편과 동행했는데 다음부터는 혼자 와야겠다 다짐했다.


교수님 상담에 들어가기 전, 정확한 진단을 위해 질 초음파를 찍어야 했다. 줄지어 초음파 실에 들어가는 여성들 사이에서 있으니 무언가 공장에 온 것 같다.

 “000님 들어가실게요.” 직원 안내 방송이 나오면 하나둘씩 탈의실에서 치마로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리다 본인 이름이 스크린에 띄워지면 지정된 번호의 촬영실에 들어간다.


초음파실에 들어가면 선생님 한분이 좁은 방에 앉아 계시고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를 나누면서 팬티를 벗어 손에 쥔다.

그리고는 굴욕 의자라 불리는 진료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받침대에 다리를 얹는다.

 “조금 불편하실 거예요.” 진찰해주시는 선생님이 잠깐 참아보라는 신호를 주시면 초음파 기계를 내 아래로 수욱 넣으시고는 이리저리 들여다보신다.

초음파는 나도 같이 볼 수 있는데 까맣고 하얘서 뭐가 뭔지는 잘 모른다. 말씀대로 기계가 이리저리 내 안에서 돌려지고 당겨지니 불편하다.


“참, 저는 우측 난소가 없어요.”

기계를 힘껏 당겨 오른쪽 난소를 보시려는 것 같아 말씀드렸다.

 “아 그러시군요.”

선생님은 기계를 반대쪽으로 돌리셨고 무언가 컴퓨터로 따닥따닥 클릭하는 소리가 나면서 무언가의 치수를 재는 듯해 보였다. 곧이어 촬영은 종료됐다.


그리고 또 한 시간여를 기다려 드디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3주 뒤 항암을 시작할 예정이라 그전에 난자 냉동을 하고 싶어서 왔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얼른 시작해야겠네요. 보통 생리 끝나고 이튿날부터 시작하는데 시작할 수 있는 상태네요.” 초음파 촬영본을 보며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난자 냉동을 하려고요? 수정란 냉동이 난자 단일 냉동보다 더 오래전부터 하던 거고 안정성이나 성공률이 높아요.”

성공률이 높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수정란 냉동으로 결정했다. 더군다나 난자 냉동은 국가 지원이 불가한데 수정란 냉동은 거주지역 보건소에 신청하면 백만 원 상당의 지원금이 지급된다. (법률혼뿐만 아니라 사실혼도 지원된다.)


가급적 한 번에 많은 양의 난자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과배란을 유도하는 주사를 맞아서 ‘난포’(난자가 배란되기 전 주머니 모양의 세포 집합체)를 키워야 한다. 자가 주사를 시작하기 가장 최적의 시기는 생리가 끝난 후 이틀 정도가 경과하는 시점이라고 하는데 나는 사흘 째였다. 근소한 차이라 시작이 가능했고 바로 주사제를 처방해주셨다.


첫 주에 맞은 주사는 2가지 종류였고 채취일이 가까워질 때에는 3가지로 늘어났다. 난포 상태에서 채취해야 하기 때문에 막바지에 가서는 배란 억제제를 추가해서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매일 배꼽에서 5센티 정도 떨어진 살이 두툼한 부근에 놓으면 되었다. 주삿바늘은 굉장히 가늘어서 혼자 배에 찌르기에 그다지 공포스럽진 않다. 주사 공포증이 있는 우리 남편은 그것도 쳐다보지 못했지만.


사실 주사 맞는 건 쉬운 일에 속했다. 나는 이틀에 한번 꼴로 내원해서 난포가 잘 크고 있는지 관찰하기 위해 질초음파 검사를 해야 하는 게 더 곤욕이었다.



병원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난임센터 담당 교수님이었다.

 “수정란으로 결정하셨는데 하나 알아두셔야 할 걸 말씀을 못 드려서요. 난자 일 경우에는 관계가 없지만, 나중에 시험관 시술 시 냉동한 수정란은 지금의 혼인 관계가 유지됐을 때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아……! 네,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듣고는 무릎을 탁 쳤다.. 동시에 마치 구름 속에 둥둥 떠있다가 현실을 깨우치는 서늘함이 있었다. 남편의 정자와 나의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이루었을 때부터 그건 우리 공동의 소유이자 책임이라는 사실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코 부정적인 기분은 아니었다.


2주가 흐른 후, 11개의 난자가 채취되었다. 배아 생성은 대략 5일가량이 더 소요되었고 3개의 수정란을 얼리는 데 성공했다는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생각

미혼일 때 결혼과 출산은 내겐 너무 막연한 일들이었다. 언젠간 벌어질 일들이겠지가 다였다. 결혼은 모두에게 선택인 시대적 분위기 때문일까. ‘결혼은 필수’라고 말하는 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은 나 자신이 행복한지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비혼을 선택한 싱글은 자유롭고 당당해 보인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딩크족 부부는 아이가 있는 가정과 분명 다른 종류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부부 둘이서 오붓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참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육아의 힘겨움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고 개인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도 있을 거다.


결혼한 지 1년 차인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는 것에 망설이고 있었다. 한창 회사를 다니며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고령임신이라 불리는 나이 서른 다섯 전에만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올해 봄 나는 돌연 암환자가 되었고, 암 수술로 한쪽 난소를 잃었다. 난소 나이 검사 결과 42세가 나왔다. 난소는 한 두 살도 아니고 내 나이보다 10년이 늙어 있었다. 항암을 하면 난소 기능이 더 떨어져 폐경이 올 수도 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할 위기에 처하니 반작용으로 가지고 싶어 진 걸까?


매일 같이 난임센터를 다니며, 내 배에 주삿바늘을 찌르며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아이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것에 순응하고 살자고 다짐도 했는데. 가능성을 포기하기 싫어서 가임력 보존술로 수술도 받았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아이 낳을 준비를 하고 싶은지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나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에 속한다. 하지만 아이를 잘 돌볼 자신이 있는 축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은 이유를 나열해보자면,


1. 부부의 가치관

우리 부부는 앞으로 살아갈 긴 세월에 아이가 함께 있는 행복한 가족을 꿈꾼다. 끈끈한 가족애를 형성하는데 아이가 큰 존재가 되어 주리라 생각한다.


2. 남편의 성향

부부생활은 조별과제와 같다. 협업이 잘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가사를 분담하는 것처럼 육아에도 성실히 임할 타입이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스킨십에 자연스러운 편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 사랑을 줄 줄도 아는 사람이다. 남편과 함께라면 독박 육아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3. 부모 자식 간의 무조건적인 사랑

부모가 쏟아야 할 희생이 어쩌면 본인의 인생을 뒷전으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에게 사랑을 준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아이도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것이다. 우리들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4. 우리를 닮은 아이와의 인연

남편과 나를 닮은 아이를 이번 생에 만나는 것. 그 자체로 이유가 된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눈물 난다.


5. 사실 이유가 크게 중요하진 않다.

인간이 계획을 하면 하늘에서 비웃는다고 하는데 내 뜻대로 될 리가 없다. 그래도 내가 어느 쪽에 설 것인가는 정해두고 싶었다.


암 선고를 받고 인터넷 카페에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선배 환우님들이 수술과 항암을 모두 마치고 2-3년 정도의 추적검사를 거친 뒤 임신에 성공한 본인들의 사례를 들며 응원해주었다.


가능과 불가능의 확률이 반반인 곳에 서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나는 가능만 생각하고 거기에 내 패를 걸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하게 된다 해도 상심하지 말자. 인간은 어떻게든 다른 형태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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