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없는 교실’이 내게 건넨 위로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조금 무거운,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발을 딛게 되는 ‘마음의 바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제게 ‘자존감’은 늘 성적표와 같았어요.
남들보다 한 계단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야만 겨우 안심할 수 있는 위태로운 계단 말이지요.
그 지독한 습관은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림자처럼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뒤처지는 것 같을 때,
혹은 내가 다른 엄마들만큼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제 자존감은 예외 없이 차가운 바닥을 치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제가 마주하는 것은 ‘비교’라는 이름의 촘촘한 창살이었어요.
처음부터 창살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옆집 아이의 유창한 영어 발음을 보며 한 줄,
SNS 속 완벽하게 차려진 어느 집의 식탁을 보며 또 한 줄,
그렇게 스스로 그어 내린 선들이 어느덧 저를 꼼짝달싹 못 하게 가두는 감옥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 창살은 참 묘해요.
밖이 훤히 내다보여서 자꾸만 남들의 화려한 풍경과 저의 초라한 거실을 비교하게 만들거든요.
보이지 않는 철창 안에 갇혀 "나는 왜 저들처럼 빛나지 못할까"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이,
제 마음의 뜰은 돌보지 않아 거칠어지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의 교육 현장을 마주하며, 저는 비로소 그 창살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것은 세상이 내게 친 울타리가 아니라,
‘상대평가’라는 한국식 잣대로 제가 직접 세운 마음의 감옥이었다는 사실을요.
캐나다의 교실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1등’이 존재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저마다의 결을 가진 나무처럼 자라납니다.
누구는 일찍 꽃을 피우고, 누구는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 집중하죠.
선생님은 "누가 제일 잘했니?"라고 묻는 대신,
"너는 오늘 어떤 발견을 했니?"라며 아이의 어제와 오늘을 연결해 줍니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진리가 제 굳어있던 마음을 건드렸어요.
아이에게 "너는 존재 자체로 충분해, 네 속도대로 가렴"이라고 늘 다정하게 말해주면서,
왜 정작 나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해주지 못했을까요?
캐나다 교육이 제게 가르쳐준 건 단순히 아이를 잘 키우는 기술이 아니었어요.
나라는 사람 또한 누군가와 비교당하며 순위가 매겨질 존재가 아니라는, 아주 당연한 존중의 방식이었습니다.
캐나다 학교 복도를 걷다 보면 유독 자주 마주치는 문구가 있습니다.
"Your only limit is you(너의 유일한 한계는 바로 너 자신이야)라는 말이지요.
처음에는 이 말이 '더 노력해서 한계를 돌파하라'는 채찍질처럼 들렸어요.
하지만 아이들의 교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 만든 '비교의 창살'에 갇히지 말라는,
너만의 고유한 가능성을 믿으라는 다정한 응원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아이가 옆 친구보다 수학 문제를 빨리 풀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줍니다.
대신 "너는 오늘 네가 세운 목표에 얼마나 다가갔니?"라고 물으며,
아이가 스스로 만든 성장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며 저는 저를 가두었던 창살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남들보다 늦은 건 아닐까', '내가 너무 부족한 엄마는 아닐까' 하며 스스로를 가두었던 그 촘촘한 생각들이, 사실은 제가 만든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요.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는 건, 역설적으로 이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보고서야
저는 비로소 창살 너머가 아닌, 제 안의 하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1등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 교실처럼,
저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지요.
내가 나를 따뜻하게 긍정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아이의 ‘속도’가 아닌 ‘무늬’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엄마의 자존감은 아이의 성적표나 타인의 박수 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오늘 하루, 내가 나를 얼마나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오늘도 스스로가 세운 창살 안에서 외로워하고 있을 많은 엄마들께,
이 글이 작은 위로의 창문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