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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Aug 05. 2022

내 방학의 색깔은 빨강

현정이에게

인생의 시기별로 방학의 색깔이 다양하게 떠올라서 정리가 되지 않더라. 오늘에서야  내 방학의 색깔이 떠올랐어. 내 방학의 색깔은 대체로 빨강이었어.



 코피의 빨강

 우리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가을에 운동회를 했잖아. 그러면  가을 운동회를 위해서 한 달 전부터 여자아이들은 '부채춤', '마스게임' 같은 걸 연습했던 기억이 나.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야. 학교에서 6학년 어떤 반의 담임 선생님이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중에서  몇 명을 뽑아 여름방학부터 사물놀이를 가르치고 연습을 시킨 거야. 그때 나는 '꽹과리'를 치는 아이로 뽑혔지. 기억나는 이유는 단 하나! 키가 작아서 귀엽다 정도. 내 기억에 초등 4학년 때 나는 130센티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작은 아이가 야무지게 앞장서서  꽹과리를 치는 게 어울린다고 했어. 그리고 키가 큰 우리 오빠가 6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우리 오빠는 '징' 담당으로 뽑혔지. 그래서 나와 우리 오빠는 여름 방학 내내 꽹과리와 징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나가야 했어.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었지. 처음엔 꽹과리를 주지도 않고 그냥 맨손으로 책상 바닥을 치게 하면서 박자를 가르쳐 주셨고, 박자를 익히고 감을 익힌 후에야 꽹과리를 직접 쳐본 기억이 난다.  처음엔 정말 재미가 없었지만 선생님은 무서웠고, 그냥 하라면 하는 건 줄 알고 그렇게 온 여름방학을 '꽹과리' 배우기에 바쳤어.  그걸 위해서 더운 여름 방학을 매일 같이 학교에 걸어 다녔던 조그만 나는 체력적으로 힘이 들었을까? (그 시절엔 엄마 아빠가 학교에 태워다 주던 시절도 아니니 매일 같이 오빠와 나는 먼 학교를 뙤약볕에 걸어 다녔지. )


  그러던 어느 날, 잠을 자는데, 뭔가 물 같은 것이 코에서  주르륵 흐르는 기분이 드는 거야. 이상하다 싶어서 손으로 쓱 닦았는데, 양이 생각보다 많더라고. 그래서 일어나 보니 ' 코피'였던 거야.  그때가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린 코피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꽹과리'의 고수가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더 거 같아.  그때 그렇게 코피까지 흘려가면서 배운 꽹과리 솜씨는 가을 운동회에서 가장 멋진 무대로 박수를 받았고, 나는 이 나이 먹도록 꽹과리의 굿 장단을 기억하고 있으니 코피 흘릴 만한가?


 

토마토의 빨강

 그렇게 코피까지 흘려가며 여름 방학을 보내던 어린 초등학생인 나에게 아주 달콤한 빨강도 있었지. 나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살았어.  내가 살던 시골의 집은 그 동네에서는 제일 큰, 나름은 동네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집이었지. 그래서 없는 게 없이 다 있는 집.  어린 내 눈에 가장 풍성하게 많았던 건 빨간 토마토였어. 집이 워낙 크다 보니 넓은 마당  구석구석엔  귀한 과일나무도 많았는데 그 어떤 귀한 과일보다 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건 빨간 토마토였어. 할머니는 여름만 되면 넘치게 열리는 토마토를 매일매일 따서 깨끗이 씻고 썬 다음 달달한 설탕을 뿌려서 네모난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셨지.  그리고  여름 방학 간식으로 우리에게 늘 꺼내 주곤 하셨어. 특히나 꽹과리를 배우고 돌아오는 그 더운 여름날 할머니가 냉장고에서 꺼내 주는 설탕에 절여진 토마토와 마지막에 마시는 그 토마토 국물은 어떤 비싼 음료수나 아이스크림보다도 맛있었던 거 같아.  지금도 가끔 할머니가 생각나거나 유년시절의 해맑던 방학이 그리워지면 나는 토마토를 그렇게 설탕을 뿌려서 먹기도 해.


엄마의 열정으로 빨강

 얼마 전 중학생들과 하는 수업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최재천 교수님의 책 <과학자의 서재>를 보는데 이런 말이 나와.

<과학자의 서재> 최재전 지음, 명진출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우리 영혼과 가슴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만들어낼 밭을 일구는 것인데 말이다.

 이 말을 보면서 한참 생각했어. 방학은 교수님의 말씀처럼 내 영혼과 가슴에 새로운 밭을 일구어 주게 할 시간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힘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밭을 일구게 할까 생각 중이야. 그러다 나는 일단 밭에 거름을 좀 주기로 했어. 거름? 잘 먹자! 사서 먹이는 거 말고, 엄마의 정성과 마음을 담은 영양 가득한 음식으로 내 아이의 마음 밭에 거름을 좀 주자. 그리고 나에게도!  그래서 이번 여름 방학은 엄마의 요리 열정으로 빛나는 빨강이 칠해지고 있어. 또 빨강이네~^^






<육 센치 여섯 살>프로젝트

키는 육 센치 나이는 여섯 살 차이 두 여자. 마흔이 넘어 인생을 조금 알게 된 육 센치 작고 여섯 살 많은  언니와 인생을 좀 안다는 나이 마흔이 되기를 갈망하는 육 센치는 크고 여섯 살은 적은 동생이 책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습니다. 언니는 독서교실 선생님으로 동생은 그림책 활동가로 살아갑니다. 책을 매개로 삶을 성찰하고 글을 쓰며 마음을 나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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