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Way Maker

길 위에 선 사람의 첫 고백

by Bloomlink

“나는 하나님의 생각을 수학적으로 읽어내려는 사람이다.”
– 요하네스 케플러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마음이 크게 울렸다.
별의 움직임과 수학적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읽어내려 했던 그의 고백은 단순한 학문의 언어가 아니었다. 경외와 겸손, 그리고 길 위에 선 자의 태도였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지만, 그의 말속에서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보았다. 나 역시 삶의 길 위에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흐름을 읽어내려는 사람이고 싶다.

돌아보면 나는 수많은 길 앞에 섰다. 어떤 길은 스스로 열 수 있다고 믿으며 발을 내디뎠고, 어떤 길은 억지로라도 뚫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선택했다. 그러나 내가 만든 길은 번번이 무너졌다. 반대편에서,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 주님이 열어주신 길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배웠다. 길은 내가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 속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비교와 조급함에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내 또래가 앞서가는 모습을 볼 때면 내 걸음은 늘 더디고 흐릿해 보였다. 불안은 조급함이 되었고, 조급함은 쫓기듯 결정을 재촉했다. 그 선택들은 보통 “지금은 맞아 보이지만 나중에 후회되는 길”로 흘렀다. 앞서가야 한다는 마음이 오히려 나를 멀리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 시기에 내가 잃어버렸던 것은 능력이 아니라 평안이었고,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불안은 커졌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계획표를 고치고 또 고쳤다. 일정과 목표를 촘촘히 적어 내려갈수록 마음은 이상하게 비어갔다. 그때 조용히 떠오른 한 생각. “멈추어라. 그리고 기도하라.” 계산을 멈추고 의자를 뒤로 밀어냈다. 두 손을 모으고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저 앉아 있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이 내 마음의 시계를 한 칸 늦추었다. 조급함이 숨을 고르기 시작했고, 불안의 결이 옅어졌다. 다음 날 아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연락이 왔다. 간단한 만남 제안이었다. 의미 없어 보였지만 마음 한쪽이 부드럽게 눌렸다. “가라.” 작은 순종으로 자리로 향했다. 그 만남은 이후 몇 달의 흐름을 바꾸었다. 닫힌 문을 억지로 밀던 손에서 힘을 뺐을 때, 보이지 않던 다른 문턱이 빛났다.

또 한 번은 연락을 끊고 지내던 한 사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를 붙일 수 없는 이름의 잔상. 일하면서도, 집으로 걷는 길에도, 기도할 때에도 그 이름이 떠올랐다. 며칠을 망설이다 짧게 안부를 남겼다. “잘 지내나요?” 돌아온 답장은 길었다. “사실 많이 힘들었어요. 오늘이 특히 그랬고요.” 내가 한 일은 메시지 한 줄 뿐이었지만, 그 작은 순종이 누군가의 마음을 붙드는 다리가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연결되었고, 시간이 지난 뒤 함께 하게 된 일은 처음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길의 일부가 되었다. 주님이 여신 길은 종종 이렇게 조용한 안부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길은 침묵으로 열렸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며칠과 몇 주가 있었다. 그 시간이 무력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다. 그 침묵이 내 귀를 맑게 했다는 것을. 소음과 소식이 가라앉아야 미세한 흐름의 움직임이 들렸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일이, 내 안의 나침반을 조금씩 북쪽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나는 6편에서 배웠던 ‘방향감각’을 여기서 또 배웠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 결과가 아니라 해석. 침묵의 날들이 그 해석을 가르쳤다.

작은 순종들을 나는 ‘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점 하나로는 그림을 알 수 없지만, 점과 점이 만나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도형을 만든다. 그 도형이 다시 구조가 되어 길을 드러낸다. 7편에서 ‘흐름’과 ‘연결’을 말했고, 8편에서 ‘작은 순종’을 노드에 비유했다. 이제 보니 주님은 오래전부터 내 삶의 곳곳에 점들을 찍고 계셨다. 나는 때때로 그 점들 사이를 마음대로 이어 버려 길을 엉뚱한 쪽으로 구부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기도는 지우개였다. 잘못 그은 선을 조용히 지워내고, 다시 연결할 수 있게 해 주는 시간. 때로는 한 점을 그냥 점으로 남겨 두는 용기도 배웠다. 모든 점이 지금 당장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때로 나보다 더 천천히, 그러나 더 정확히 선을 그으셨다.

내가 만든 길은 화려했다. 계획의 언어로는 늘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그 길은 종종 오래가지 못했다. 반대로 주님이 여신 길은 작게 시작되었다. 안부 한 줄, 미뤘던 사과 한 통화, 회의 시간에 들은 누군가의 한 문장, 주말 오전의 한 시간 기도. 작은 것들이 길의 문턱이 되었다. 문턱은 높지 않지만 건너야 다음 방이 열린다. 그 문턱을 넘는 일은 대개 자존심을 한 번 접는 일, 시간을 조금 떼어내는 일, 미루지 않는 일 같은 모습으로 왔다. 작지만 분명한 순종의 문턱들. 그 문턱들을 넘을 때마다 다음 방의 공기가 달랐다.

나는 이 경험들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작은 순종 일기.” 날마다 아주 작은 한 가지를 적었다. 오늘은 먼저 전화했다. 오늘은 끝까지 들었다. 오늘은 기다렸다. 오늘은 덜 말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 기도했다. 한 줄 한 줄은 별 것 아닌 기록이었지만, 몇 달이 지나자 노트에는 길의 패턴이 보였다. 주님이 여시는 길은 늘 비슷한 리듬을 갖고 있었다. 기다림–경청–확인–순종–감사. 그 리듬을 타면 마음의 호흡이 안정되었고, 결정의 품질이 달라졌다. 조급함이 끊어지면 선택은 더 단단해졌다.

나는 나침반을 떠올렸다.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지 않을 때는 흔들림이 먼저다. 충분히 흔들리고 난 뒤에야 바늘은 다시 자리를 잡는다. 내 마음도 그랬다. 흔들리는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림을 거쳐 다시 북쪽을 가리키는 일, 그 북쪽이 ‘주님의 마음’ 임을 잊지 않는 일. 6편에서의 나침반, 7편에서의 다리, 8편에서의 노드. 이 모든 이미지가 9편의 지금, 한 장의 지도 위에서 만난다. 나침반은 방향을, 다리는 단절을 건너는 방법을, 노드는 연결의 지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지도는 이 셋을 한 화면에 담는다. 그 지도에 길을 그리는 분은 주님이시다. 나는 그 지도를 읽으며 걷는 사람이다.

메타프레임워크에 대한 생각은 여기서 싹이 트었다. 프레임워크는 도구지만, 도구를 움직이는 방향은 영(靈)에서 온다. 큰 구조를 보는 눈이 흐름을 읽게 하고, 작은 실행을 놓치지 않는 손이 구조를 살게 한다. 나는 이 둘을 함께 배우고 있다. 작은 순종은 노드이고, 주님의 흐름은 맵핑의 기준이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랑은 정렬(alignment)의 축이다. 2부에서 이 이야기를 더 체계적으로 풀어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 모든 설계가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길을 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나는 여전히 완성형이 아니다. 가끔은 다시 비교하고, 가끔은 다시 조급해진다. 다시 잘못된 선을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처럼 오래 방황하지 않는다. 멈추고 기도한다. 마음의 시계를 늦추고, 작은 순종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한 발만 내딛는다. 한 발을 내딛으면 다음 발이 보이고, 그다음 발이 또 보인다. 길은 그렇게 보인다. 멀리서 한꺼번에 환히 켜지는 것이 아니라, 발 앞 한 칸씩 밝혀지는 방식으로.

오늘의 나는 케플러의 문장을 이렇게 내 말로 바꾸어 본다. “나는 하나님의 생각을 삶의 흐름 속에서 읽어내려는 사람이다.” 별의 질서를 보듯, 사람의 마음과 사건의 결을 읽고 싶다. 그 결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배우고 싶다. 내가 길을 만들지 않아도 좋다. 이미 열려 있는 길을 보게 해 달라고, 그 길 위에서 작게 순종하게 해 달라고, 그래서 누군가의 삶과 누군가의 마음을 잇는 다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Way Maker.

길을 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나는 단지 그 길 위에 선 사람으로, 첫 고백을 남긴다.
이 고백이 나의 출발점이고, 동시에 다음의 여정으로 넘어가는 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