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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Feb 24. 2024

미운오리새끼



며칠 전 눈이 잠깐 사이에 눈싸움을 만큼 내렸다.

집에 놀러 온 조카손주와 눈으로 오리 만드는 집게를 들고 놀이터로 나갔다.

오리를 만들다 보니 꼬리가 생긴 오리가 만들어졌다.

"미운오리새끼네..."

갑자기 어릴 때 미운오리였던 내가 생각이 났다.


60년대 후반

서너 살 때의  나는 미운오리였다.

오빠의 귀공자 같은 모습에 비교당하는  몇 개 나지 않은 머리털마저 노랗고 부스스했다. 늘 식모손에 안겨져 있었고 오빠는 나비넥타이에 멜빵바지 양복차림으로 아빠엄마손에 외출을 다녔다. 오빠는 어딜 가도 잘생겼다 멋지다란 말로 칭찬일색이었다.

아빠는 집에서 천덕꾸러기처럼 봉순이 언니 손에 안겨져 있는 나를 보고

"달래도 데꼬가지 왜~~? "하며 엄마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건만 엄마는

 "둘이 데리고 다니기도 힘들어요. 아직 어리니 집에 있으라고 해요!"

나는 늘 찬밥신세였다.

5,6살까지 나는 그런 못난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꾀가 났다.

엄마 아빠가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미리 차 뒷자리에 타있었다. 그 차를 타고 바깥세상을 엄마아빠랑 다니고싶었다.

기사 아저씨가 올려서 태워주셨다.(아빠가 헌병장교여서 지프차로 출퇴근을 하셨다.)

늘 집에만 있는 나를 기사아저씨도 어여삐 여기셨던 것 같다. 측은하게 나를 내려다보시고는 두 팔로 들어 태워주신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곧 엄마아빠가 나오시면 나는 어떻게 될까?'

차에서 내리게 할까 아님.... 가슴이 곤두박질쳤다.


10여분 지나서 엄마가 나를 찾는다.

"달래 어디 갔지?..."

찾다가 봉순언니한테 달래 잘 보고 있으라고 저녁 먹고 들어온다며 당부를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고

봉순이 언니의 나를 찾는 소리도 함께 동시에 들렸다.

셋이 말끔하게 차려입고 지프에 타는 순간,

뒷자리에 납작 엎어져 있는 나를 엄마가 먼저 발견하신다.

"어머~ 얘 모야? 달래 여기 있었네!"

"기사아저씨가 태웠죠?"

"사모님, 그냥 달래도 데리고 가시죠~ 제가 잘 돌볼게요. 얼마나 나가고 싶었으면 차에 숨어 들어와 있었겠어요?"

나의 행색은 빨간 슬리퍼에 다 늘어진 티셔츠에 빨간 멜빵바지를 입은 동네골목에서 노는 상거지였다.

"그냥 데꼬 가지 뭐! 밖에서 놀고 있으라고 하지 저렇게 탔는데!"

아빠의 나를 구제하시는 목소리가 그렇게 다정하게 들린 적은 없었다.


춘천에 아빠가 근무하실 때인데 60년대 후반 춘천에 무슨 체육관을 개관했다고 기념식에 나가는 길이었다. 차에 타서도 나는 엄마 아빠 눈치를 살살 봐야만 했고 편치 않았다.

'다시는 따라오지 말아야지!'

 나는 식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기사님 하고 밖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사진이 지금도 있는데 나는 슬리퍼차림의 시골아이같이 생긴 모습 그대로이다. 그때 그 기억이 사진을 볼 때마다 생생하다.


'나는 미운오리구나.. 어디서 주워왔나 보다..'

'엄마아빠를 찾으러 나가야 하나?'

이모들이 오시면 "달래 너, 다리밑에서 주워왔어 몰랐구나!"

할 때는 집 근처 다리밑에 가서 진짜 엄마를 찾아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사람꼴이 박히기 시작하니 오빠보다 내가 더 귀티가 난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그때까지 나의 머리는 여러 번 삭발이 되어야만 했다.)


드디어 역전되었다.

엄마가 어디 나가실 때 나만 데꼬 나갔다. 오빠는 중학생이 되면서 머리만 커지고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이다.

고거 쌤통이다.

드디어 나는 백조가 되었다.

미운오리가 아니었던 거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공부도 오빠보다 잘하고 이쁘게 자라서 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 칭찬과 부러움을 받는 백조로 어느새 탈바꿈하고 있었다.

오빠는 밖으로 나돌며 그림을 그린다고 화실에 들어가더니 선배를 두들겨 패고 또래 애들하고도 싸우지 않고 선배들을 이겨 먹으려 했다.

엄마는 한숨지었다.

오빠가 미운오리가 되었다.


참기 잘했네...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나의 전성시대!!


그리고.....(중략-치앙마이 해외 살기 곧 연재로 2탄 올립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7년 전에 엄마 아빠가 80이 다 되어 두 분이 1년 차이로 하늘나라에 가시기까지 엄마아빠는 내가 모시었다.

어릴 때 구박은 받았어도 엄마아빠의 진심 어린 사랑을 받고 자랐음을 크면서 알았기에 나도 진심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하늘나라에 가면 부모님을 만나겠지? 그러면

" 어릴 때 나를 왜 구박했냐고요~" 못났어도 똑같은 자식인데 ,, 흥칫뽕!

하고 물어봐야지~


나도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엄마도 둘을 챙기기가 힘드셔서 그랬을 것 같다. 몸이 약하셨다.

아니면 다리 밑에 진짜 나의 엄마 아빠가 있었던 거는 아닐까?

그럴 확률은 없다. 난 아빠엄마를 무지하게 닮았으니까... (끝까지 우기기!)

못난 사진  궁금하시죠?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드릴까 합니다. 선머슴같이 생긴 6살의 달래입니다.

새마을호 생겼을 때 가족들과 부산 할머니댁에 가는 길입니다.

저 주워온 아이 같나요?




눈이 내리니 오리도 만들고 나를 추억으로 여행을 시켜준 눈송이들을 보며 감상에 젖어본다.

이 눈길을 엄마아빠랑 걸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많이 그립다.





꼬리까지 달린 미운오리여 안녕~!

꼬리 달린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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