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게 있다. 우리가 거부할 수도 수정할 수도 없는 삶의 운명. 마당에서 또 생명이 태어났다. 마당엔 제법 큰 나무가 있어 이런저런 새들이 찾아오곤 했지만 비둘기가 날아든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작은 나뭇가지를 물고 왔으니 필히 집을 짓는 것이겠구나. 며칠 후, 나무의 중턱 깊은 곳에 둥지가 만들어졌고 비둘기는 알을 낳았는지 꼼짝도 않는다. 그렇게 3주. 그동안 밤에 세찬 비가 몇 번 내렸건만 비둘기는 온몸으로 비를 맞으면서도 결코 둥지를 떠난 적이 없었다. 감동이다. 짐승의 모성애가 인간의 그것보다 강할 수도 있겠구나. 어느 날 비둘기가 보이질 않아 둥지를 들여다보니, 털북숭이 새끼들이 뭉쳐있다. 작은 공처럼 뭉쳐있어 몇 마리인지 몰랐는데, 다시 보니 두 마리다. 비둘기는 늘 두 마리 새끼를 낳는단다. 세 마리만 되어도 별종이라나.
비를 맞아도 떠나지 않던 어미가 새끼가 부화하고 나니 집을 떠난다. 아마도 자신도 그동안 굶주린 배를 채우고 새끼들을 먹일 먹이를 가져오는 거겠지. 운명은 잔인하다. 새끼가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태풍이 몰려왔다. 인간은 미리 그 소식을 알았고 대비도 하지만, 비둘기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니 운명은 잔인하다. 미리 알았더라도 엄마 비둘기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둥지는 허술했다. 태풍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견고함이 아니다. 둥지가 손에 닿지 않으니, 그저 둥지 아래 바닥에 이불을 깔아줄 수밖에. 혹시 새끼들이 거센 태풍의 바람에 떨어져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태풍은 왔고, 인간들은 잘 버텼다. 밤새 비와 바람을 느끼며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비둘기 새끼들이 살아 있을까 걱정될 뿐이다. 아침이 되니 비도 그치고 바람도 잦아 서둘러 마당으로 나갔다. 거뭇한 작은 덩어리가 보인다. 비둘기 새끼 두 마리가 모두 바닥에 떨어진 거다. 비를 맞아 축축하고 쪼그라들어 죽은 줄 알았다. 두 아이를 손에 담아 살펴보니 아직 살아있다. 생명. 서둘러 집으로 들어와선 자는 아내를 깨워 헤어드라이어로 아이들을 말리고 덥혀주니 조금 살아난 듯했다.
어미가 왔다. 아마도 밤새 태풍을 몸으로 막아내었고 아침이 되었으니 새끼들 먹이를 마련하려 둥지를 떠났으리라. 그리고 비와 강풍을 막아줄 어미가 떠나자 새끼들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고. 새끼들 먹일 먹이를 물고 왔으나 둥지는 비었으니 어미는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 그 순간, 새끼들은 겨우 죽음을 넘긴 채 내 품에 있었고, 둥지는 내 손에 닿을 수 없었으니 새끼들을 다시 둥지에 놓아줄 수 없었고, 그것이 비둘기 엄마와 새끼들의 이별의 운명이었다.
엄마 비둘기는 다시 오지 않았다. 둥지에 새끼들이 없었으니, 죽었다 생각했을까, 잡혀 먹었다 생각했을까. 그렇게 포기하다니. 그 세찬 비를 맞아가면 알을 품었던 모성애가 그리 쉽게 사라졌단 말인가. 그리 쉽게 새끼들을 포기한다는 말인가.
이틀간 새끼들을 작은 상자에 넣어 나무 둥지 근처에 놓았다. 어미 비둘기가 오면 새끼들을 발견하고 품어주리라 기대했지만, 어미는 오지 않았다. 결정을 해야 했다. 결국, 버려졌음을 인정하고 추위에 떨지 않도록 집 안에서 새끼 두 마리를 보호했다. 한 놈이 서질 못한다. 나무에서 떨어질 때 다리든지 날개든지 다른 어딘가를 많이 다친 모양이다. 동물병원 이곳저곳에 전화를 해봤지만, 비둘기 새끼를 봐준다는 곳은 없었다. 여긴 시골이니까.
인터넷을 찾아 결국 이유식을 알아냈고 그런대로 성공했다. 새끼들은 내 손가락을 어미로 알아 입을 벌렸고 나는 주사기로 이유식을 먹였고, 그렇게 며칠을 먹이니 몸도 커졌고 제법 힘도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다치지 않은 새끼의 이야기일 뿐 다친 아이는 입도 크게 벌리지 않아 이유식도 많이 먹지 못했고, 몸을 다쳤으니 서있지 못하고 그저 넘어질 뿐이었다. 날개 짓을 하며 서 보려고 애쓰나 결국 또 넘어진다. 그리고 이유식을 잘 받아먹지도 못하니 난 알았다. 이 아이는 오래 버티지 못하겠구나.
결국 다친 아이가 죽었다. 몸이 굳었다. 크게 슬프진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고, 사람이나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니었으니까. 무심히 마당에 묻었고 그게 다였다. 죽음은 같은 것인데, 사람이나 강아지가 아니라고 이렇게 마음 아프지 않다니.
그렇게 비둘기 새끼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는 게 없어 막막했다. Pigeon Milk. 진짜 젖은 아니고 어미가 모이 주머니에서 반쯤 삭힌 먹이를 다시 게워 새끼에게 먹이는가 보다. 이유식을 만드는 법을 익히다가 문득, 비둘기는 곡식 같은 걸 먹으니까 내가 먹는 생식을 먹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득도. 생식에 단백질 섭취를 위해 달걀노른자를 넣고 물에 잘 섞으니 훌륭한 이유식이 됐다. 그리고 아이가 입을 벌렸을 때, 그러니까 부리를 잔뜩 벌렸을 때, 주사기로 목 깊숙이 넣어주면 끝. 새끼는 네 시간마다 밥을 먹는다니 내 아이를 키울 때 보다 더 힘들다.
며칠 지나니 아이가 살아났다. 벗겨진 피부에 제법 털도 나고 걷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 집 강아지들. 비둘기 밥을 먹이고 나면 강아지들이 비둘기 입에 묻은 생식을 핥아먹느라 난리다. 그리고, 결국 사고가 터졌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우리 집 막내 깡패가 비둘기 털을 죄다 뽑아놨다. 괴롭히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나, 강아지 발 짓은 어린 비둘기한테는 엄청난 살상 무기나 다름없었으리라. 이 아이가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니 살 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생명의 힘을 다시 느낀다. 열심히 밥을 먹으니 비둘기는 힘이 생겼고, 빠진 깃털이 다시 났고, 태풍에 엉망이 돼서 맨 피부만 있던 곳에 잔 털들이 가득 생겼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니, 이 아이가 드디어 날기 시작했다. 날개에 이상이 없음을 알게 되니 정말 안심이고 감사한다. 아직은 창가에 마련해 놓은 박스에서 내 책상까지 한 1미터 정도지만, 더 멀리 더 오래 날게 되기를.
며칠이 또 지나자 비둘기는 온 집을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상처 난 피부는 풍성한 털로 뒤덮여 제법 비둘기같이 됐다. 그리고 진짜 문제가 생겼다. 비둘기는 더럽다. 하루에 열 번, 아니 열다섯 번 정도 똥오줌을 싼다. 날기 전에는 집으로 마련해 준 종이박스 안에서 똥오줌을 쌌지만, 이젠 날아다니면서 온 집에 똥오줌을 싼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곳에 비둘기 똥오줌이 많다. 강아지 똥은 뒤늦게 발견해도 그저 집어 내면 끝이지만, 비둘기 똥은 늘러 붇어 부식을 시작한다. 책상이나 마루는 감사할 뿐이다. 키보드 F에 똥을 싸고, 피아노 건반 위에, 그리고 모니터를 횃대 삼아 앉으면 모니터는 비둘기 똥오줌 비를 맞아 가관이다.
의자를 젖히고 책상에 발을 얹고 책을 읽는 습관이 있다. 그럼 비둘기는 내 무릎에 올라오고 배에 올라오고 어깨로 올라간다. 거기 한 참 있으면, 뻔하다. 내 어깨에 똥오줌을 싼다. 이젠 놀랍지도 당황스럽지도 않다. 비둘기가 밉지도 않다. 그저 치우고 옷을 빨면 되는 거니까. 우리 집 강아지들도 이젠 비둘기를 같이 사는 가족으로 인정한 것 같다. 괴롭히지도 않고, 강아지 방석에서 비둘기 하고 같이 잠도 잔다. 그리고 강아지 등에 똥도 싼다.
비둘기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비둘기는 절대로 바보가 아니다. 강아지보다 똑똑하다는 글도 읽었는데 그럴지도. 내가 움직이면 서재에서 거실로, 그리고 부엌으로, 그리고 화장실에도 따라온다. 이유식을 들고 가면, 어느새 내 옆으로 날아와 입을 벌린다. 글쎄, 이런 것들이 비둘기가 똑똑함을 입증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민이다. 내가 계속 키울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불가한 일이다. 날아다니며 온 집에 똥오줌을 싸대니 내가 발견하지 못한 집 곳곳은 이미 비둘기의 똥오줌 범벅일 거다. 게다가 각질. 어쩌면 이게 더 심각할 수도 있겠다. 이 아이는 부리로 온 몸을 쪼아댄다. 고양이의 그루밍 같은 건가. 몸을 청소하는 건가. 하여 이 놈이 앉았던 자리는 흰 눈이 덮인 것 같지만 눈처럼 예쁘지는 않다. 최악은, 똥과 오줌과 털과 각질이 섞이는 건데 그럼 휴지로는 어림도 없고 물휴지로 닦고 긁어내고 또 닦아내고 난리를 칠 수밖에 없으니, 어찌 이 놈을 집에서 키울 수 있으랴. 새장에 넣어 키우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 그건 인간이 편하기 위해 야생의 짐승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니까.
한 달 반이 지났으니 이젠 이별 연습을 하련다. 마당에 풀어놓아 볼 것이다. 집으로 쓰고 있는 박스에 물과 좁쌀을 넣어두고, 나도 한 참을 마당에 있을 것이다. 나무로 날아갈지, 아니면 겁먹어 집에서 나가지 않거나, 아니면 내 어깨로 날아올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랴. 보낼 수밖에. 걱정이 크다. 과연 스스로 생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제까지 내가 먹였으니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 있을지. 그리고 길고양이나 까마귀들을 피해 잘 살 수 있을지.
드디어 오늘 밥 킴을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아. 비둘기 이름은 밥 bob이다. 내가 김 씨니까 밥 킴. 둘째 아들이 결혼해서 아기를 가졌다. 며느리가 이름을 뭐로 할까요 물어 요즘은 국제화시대니까 한글과 영어 이름을 동시에 표현하는 이름이 좋지 않겠냐고 대답했고 나는 Bob을 제안했고 며느리는 한 참을 생각하더니, 아버님, 정말. 김 밥이요? 딸이면 Mary도 좋을 것 같고. 이번에 며느리가 즉시 소리친다. 아버님. 김마리? 그리곤 더 이상 내게 이름에 대해 묻지 않았다.
며칠 전 며느리가 비둘기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밥이라고 했고 며느리는 결국이군요 했다. 어쨌든, 그렇게 Bob이 된 내 자식 비둘기는 뭔가 눈치를 챘는지 훌쩍 날라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다. 조심스레 잡아 다시 베란다로 데리고 나가 하늘로 날렸더니만 잠시 허공을 날다가 다시 베란다 난간에 와서 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 지금 상황이 뭔지 생각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걸까. 당황한 걸까. 잠시 방에 와서 책을 읽다가 다시 가보니. 밥이 사라졌다. 가버렸다. 한동안 마당에서 지낼 줄 알았는데, 아는 곳도 없는데 어디로 간 걸까. 잘 날아 멀리 갔으니 다행이라 여겨지면서도, 이렇게 가버리는가 서운하기도 하고, 그리고 잘 살아갈까 염려도 된다. 태어나자마자 태풍으로 바닥에 떨어져 거의 죽어가는 놈을 하루 다섯 번씩 이유식 먹이면서 키웠는데. 이렇게 미련 없이 가버리다니.
똥오줌만 아니면 키우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가는 곳마다 따라오고, 팔에도 무릎에도 올라오고, 어깨에 앉아 같이 걷기도 하고 똥도 싸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결코 도망가지 않는 놈. 그리고 자신도 가족인 줄 알아 강아지들 누워있는 옆으로 슬며시 가서 같이 엎드리던 놈. 또 한동안 많이 보고 싶고 허전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