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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Dec 16. 2022

어미 고양이가 울었다. 나도 울었다.

엄마 저녁을 차려주려고 부엌에 있으려니 마당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기가 우는 것 같아, 그런 일은 없을 것인데도, 새끼인가 하고 급하게 문을 열어본다. 마당에는 엄마 고양이가 서 있었다. 좀 전까지 창고에도 마당에도 없었는데, 밖에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오는 길이다. 그리고, 집에 왔는데 새끼가 없으니 슬프게 우는 거다. 다시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앉아버렸다.


새끼들이 있었을 땐 새끼에만 관심이 갔다. 밥과 물을 주는 나한테 하악질 하는 어미가 밉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미가 너무 마음에 걸린다. 불쌍하다. 잘해주고 싶다. 부둥켜안고 같이 울고 싶다. 슬픔은 산자들의 몫인 게 맞다.


갑자기, 그리고 회복할 틈을 주지 않은 채, 많은 슬픔을 겪다 보니 마음에 병이 생겼다. 늘 불안하고 우울하다. 그리고 화도 난다. 그런데, 누구한테도 내 슬픔을 말할 수 없다.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거다. 듣고 조금만이라도 공감해줄 사람이 없는 거다. 하긴 타인의 감정을 공감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술 잔뜩 마시고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소리쳐 말하고 나면 마음속 돌덩이가 녹을 것 같기도 하건만, 난 고립되어있다.


마음의 병이 생각보다 더 깊어지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그럼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다. 파멸할 수도 있다. 파멸 직전에 나를 막아준 것은 걷는 일과 글 쓰는 일이었다. 칠천 걸음, 만 걸음, 그리고 만 오천 걸음, 그러다 너무 힘든 날엔 이만보를 걸었다. 걷는 일은 죽음을 막아주는 약을 먹는 것과 같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걷다 보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리고 글을 쓰게 됐다. 마음이 무거우니 글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신파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타인의 비웃음도 당연한 것이라 여겼지만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살기 위해, 나를 위해 글을 썼어야 했으니까. 매일 쓰고 어떤 날은 두 번씩 쓰기도 했다. 속에 가득했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속상함과 분노를 글로 쏟아내면 마음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졌다. 어쨌든 토해낸 거니까. 그리고 누군지 모를 몇 사람이 내 글을 읽어주면, 이 세상에는  내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착각하는 것도 내겐 위로가 되었다. 나는 완전히 고립된 것이 아니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이 확인되는 위로. 누가 내 글을 라이킷 했다고 핸드폰이 알려주면, 그 사람이 고맙다. 내 처지와 감정을 순간적으로나마 공감해준 것에 그보다 몇 배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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