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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Dec 16. 2022

거지 같은 글쓰기

책을 읽다가 좌절할 때가 많다. 나로서는 생각조차 가능하지도 않은 놀라운 표현과 은유. 글에 숨겨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학문과 사고의 깊이. 그런 문장을 만날 때 간혹 밑줄도 곤 하는데 그것은 순수한 감동의 행위일 수도 있지만 가식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 멋진 표현들을 언젠가 흉내 내 보려는 속셈이 아니던가. 더욱 난처한 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죽을 병과 삶의 고통과 혹은 모험과 도전의 경험들이 만들어낸 글이다. 극적인 글을 쓰기 위해 억지로 백혈병에 걸리고 전쟁을 겪고 있지도 않은 배신과 실연을 경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요즘 자주 읽고 있는 나쓰메 소세끼는 이렇게 말한다. 글에는 사상이 드러나야 한다. 문장을 어떻게 멋있게 끝낼지, 어떻게 감동적인 문장을 만들어낼지를 생각하는 글은 이미 삼류다. 깊은 사상이 있다면 간결하고 담백한 글이면 족하다고.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뜻은 그렇다. 그러고 보니 소세끼의 글이 지나치게 담백하다고 생각되어 이런 글이라면 나도 쓸 수 있다고 자만한 적도 있었다. 부끄럽다.


어떻게 써야 조금이라도 멋있고 감동적 일지를 고민하는 게 맞다. 그것도 고민이라면 말이다. 삼류의 글을 쓰기 위해 애쓰다 사류의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글쓰기를 전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깊은 사색을 쌓아온 삶도 아니며 내 삶이 극적이지 못한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일진대, 내 삶이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이유라면 글 쓰는 건 정말 거지 같은 일이다.


읽는 자의 반응을 생각하지 않는 글쓰기는 없다. 일기가 예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 정도. 일기라고 해도 누군가 봐서는 절대 안 되는 내용을 쓰기는 어렵다. 원함은 아니나 어쩌다 누군가 내 일기를 볼 수도 있으니까. 읽는 사람이 내 글을 어떻게 평가할까를 무시할 수 없으니 글 쓰는 것이 어렵다. 결국은 누구나 잘 쓴 글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 글에 대한 평가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쓴 글보다 더 뛰어난 글들은 세상에 넘쳐난다. 내 글보다 못한 글도 세상에 흔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글을 읽고 좋아해 줄 독자들만 생각하면 된다. 아니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다. 저절로 그런 독자층이 생겨날 것이다. 읽는 자들의  선호도 상대적이니까. 중요한 것은 나의 독자들의 숫자를 의식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밀리언 셀러나 베스트셀러를 꿈꾼다면 이미 망한 거다. 열명 정도. 혹은 열다섯. 그중에서도 진심으로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불과 몇 명일 것이니 그것에 만족하고 글을 쓰면 충분하다. 아, 몇 명도 안된다면. 그럴 가능성은 부정하겠다. 왜냐하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이 유달리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하고 그럴 것이라 확신한다.


종일 글을 생각하는 작가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고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나 같은 은퇴 노인이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환경과 조건이 그렇다. 드라마틱한 삶이 아닌데 무슨 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렇다. 내게 솔직한 글을 쓰는 것뿐이다. 독자가 없는데 무슨 독자를 의식한단 말인가. 나를 돌아보고, 내게 솔직하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웃음 짓게 만드는 글을 쓰는 것이 정답이다. 그리고, 어쩌다 나 같은 삶에 공감하는 한 두 명이 내 글을 읽게 된다면 그건 기대하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기쁨이다. 분명한 건 나를 위로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글이 진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겪었던 사건을 기술하는 것은 스토리라는 대본이 있으니 쉽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들을 글로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대본이 있는 거니까. 그러나, 아무런 사건도 사색도 없는 무료한 일상에서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가장 꾸밈없는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것이 진정한 글이 될 수 있으리라. 미리 준비한 글이 아니다. 쓸만한 소재나 경험이 있어 쓰는 글이 아니다. 그런 일들은 삶에서 아주 가끔 일어나는 것이고, 대부분의 삶은 사건도 사색도 감동도 없는 무료한 날들이다. 그럴 때 글을 쓰는 것은 고문이자 자책이고 부끄러움이지만, 그것이 가장 사실적인 내 삶이니 진실된 글이리라.


일 별 볼 일 없는 무료한 일상에서 글을 만들어내리라. 극적인 삶이 오히려 예외적인 거다. 어제와 다르지 않고, 삶의 의미를 알 수 없고, 죽지 않으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나다. 글로 적을만한 삶이 하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일기라도 써봐야겠다. 내 글에 공감해야 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들은 내 글을 읽을 리 없으니 내 글에 공감하는 자는 한 명도 없을 수 있다. 그러한 것이니 나는 오로지 내가 살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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