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산업의 국경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직무로 읽는 세상이야기 07화

by 박재영


AI는 산업의 국경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 제조부터 금융, 그룹 전략까지: 6개 기업이 보여주는 AI 직무의 변화


0. 여섯 개의 AI 직무로 읽는 서로 다른 세계

“AI는 실제로 어떤 일을 바꾸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변화는 누구의 책상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AI는 더 이상 연구실 안에 머무는 기술이 아니며 거대 테크 기업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공장의 수율 한계, 병원의 규제 벽, 금융 현장의 비용 압박, 그룹 전체의 중복 투자 혼란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같은 AI라도 산업이 다르면 받아들이는 방식도, 만들어지는 직무의 형태도, 감당해야 할 리스크도 완전히 다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조업, IT 서비스, 금융, 그리고 그룹 전략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AI가 어떻게 스며들며, 기업들이 어떤 처절한 적응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 그 최전선의 직무를 통해 살펴봅니다.


1. 물리적 세계: ‘룰 기반 자동화’에서 ‘판단의 이식’으로

디아이티 | AI SW 개발 팀장급


수율의 정점을 향한 기술 집념

디아이티는 반도체·디스플레이 검사 장비 분야의 강자로, 2005년 설립 이래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등 글로벌 리더의 파트너로 성장해 왔습니다. 단순한 장비 제조를 넘어 고객사의 양산 수율을 책임지는 '공정의 파수꾼' 역할을 수행합니다.


대표 제품: 자동화의 끝에서 마주한 한계

현재 주력 제품인 AOI(자동 광학 검사)와 레이저 어닐링(Laser Annealing: 초정밀 열처리) 장비는 이미 고도로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HBM3 E 양산 라인에 투입된 레이저 어닐링 장비는 독보적인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정이 나노 단위로 미세해지면서, 기존의 룰 기반(정해진 규칙대로만 작동하는) 시스템은 '이게 불량인지 아닌지 애매한' 영역에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AI로의 전환: 이제 '보는 눈'에 '판단하는 뇌'를 심을 때

기존 방식은 엔지니어가 수천 개의 판독 규칙을 일일이 설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공정이 도입될 때마다 이 규칙을 새로 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에 디아이티는 기존의 룰 기반 알고리즘을 유지하면서도, 그 위에 딥러닝 기반의 AI를 결합해 판단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고도화를 추진 중입니다.


AI가 단순 보조를 넘어 설비 내에서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되려는 변화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직무 핵심: 이론가가 아닌 현장 중심의 AI 설계자

이 변화를 완성하기 위해 새로 합류할 AI SW 개발 팀장에게 현장이 요구하는 임무는 명확합니다.

단순히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광학 조건이나 설비의 물리적 변수가 AI 판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현장에서 즉각 파악해야 합니다. 룰 기반 시스템과 AI의 비중을 어떻게 조합해야 최상의 수율이 나오는지 설계하는 '판단 아키텍트'의 역할입니다.


결국 디아이티가 찾는 리더는 기술을 자랑하는 개발자가 아니라, 현장의 언어를 AI의 언어로 번역해 수율 1%를 실제로 끌어올릴 실전형 리더입니다.


2. 디지털 세계: ‘대시보드’에서 ‘AI 에이전트’로

브릭 | 생성형 AI 플랫폼 및 에이전트 개발 팀장


하이테크 제조 데이터 분석의 강자

브릭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하이테크 제조업을 대상으로 시계열 데이터 분석과 예측 설루션을 제공하는 중견 기업입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최고의 제조 기업들이 브릭의 플랫폼을 통해 공정 데이터를 관리하고 있으며, 국내 제조 데이터 분석 툴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기존 모델: 분석은 날카로웠지만, 해석은 인간의 몫

브릭의 기존 주력 제품인 'BRIQUE Analytics'는 훌륭한 대시보드였습니다. Python과 통계분석 언어인 R 기반의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활용해 부품의 두께를 예측하거나 공정의 추세를 시각화하는 데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그래프라도, 결국 그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고 "그래서 지금 설비를 멈춰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현장 엔지니어의 숙제였습니다.


AI 전환: '보여주는 도구'에서 '대신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제조 현장은 점차 복잡해졌고, 엔지니어들은 단순히 차트를 보는 것을 넘어 AI와 대화하며 답을 찾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에 브릭은 AI를 단순한 부가 기능이 아닌 제품의 핵심 엔진(Core)으로 재정의하는 대전환을 시작했습니다.


사용자가 "최근 3시간 동안 수율이 떨어진 원인을 분석해 줘"라고 명령하면, AI 에이전트가 직접 데이터를 탐색하고 원인을 파악해 보고하는 LLM 기반 Agent Service를 구축 중입니다. 이는 단순 예측을 넘어, AI가 스스로 의사결정 시나리오를 설계하는 지능형 플랫폼으로의 진화를 의미합니다.


직무 핵심: 제조 도메인과 생성형 AI를 결합할 아키텍트

이 거대한 변화를 이끌기 위해 합류할 생성형 AI 플랫폼 개발 팀장의 미션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단순히 챗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조 현장의 방대한 전문 지식을 AI가 정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 검색 증강 생성: 필요한 정보를 먼저 검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정확한 답변을 생성하는 방식) 파이프라인과 벡터 DB 아키텍처를 설계해야 합니다.


제조 도메인 특유의 언어와 수치를 AI가 오해하지 않도록 LLM 파인튜닝과 커스터마이징을 주도해야 합니다.

브릭이 찾는 리더는 최신 AI 기술을 단순 구현하는 개발자가 아니라, "제조업의 문제를 생성형 AI로 해결하는 방식" 자체를 설계하고 제품화할 수 있는 전략적 개발 리더입니다.


3. 디지털 세계: ‘기록’에서 ‘의사 보조’로

이지케어텍 | AI 개발 팀장


국내 의료정보시스템(HIS)의 종가

이지케어텍은 서울대병원 전산팀에서 분사한 국내 대표 의료 IT 기업입니다. 병원의 모든 데이터가 흐르는 혈관인 의료정보시스템(HIS: Hospital Information System) 'BESTCare'를 개발·공급하며, 700억 원 규모의 매출을 기록하는 안정적인 신뢰의 기업입니다.


기존 모델: 꼼꼼한 기록 시스템, 그러나 가중되는 의료진의 피로

이지케어텍의 HIS는 대한민국 대형 병원들의 표준이 될 만큼 탄탄합니다. 하지만 의료 현장은 점점 복잡해지고 데이터는 방대해졌습니다. 의사들은 환자를 보는 시간보다 수많은 비정형 텍스트와 영상 데이터를 검토하고 차트를 기록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AI 전환: 기록하는 시스템에서 '예측하고 요약하는' 시스템으로

이지케어텍은 이제 HIS를 단순 기록 도구에서 '의사 보조 시스템(ezAssistant)'으로 진화시키고 있습니다. 방대한 의료 문서를 LLM으로 요약하고 비정형 기록을 표준화하여 의사의 판단 속도를 높입니다.


환자의 바이탈 데이터를 분석해 예후를 예측하거나 폐렴 등 질병 진단을 보조하는 AI 모듈을 시스템에 직접 흡수(Embedding)하고 있습니다.


직무 핵심: 규제와 생명 사이에서 AI를 설계할 팀장

의료 AI는 일반 IT와 달리 '안정성'과 '규제'가 최우선입니다. 새로 합류할 AI 팀장은 RAG, 벡터 DB 기술을 활용해 HIS 전체의 지능을 강화하되, 의료 데이터의 특수성을 고려한 정교한 아키텍처를 설계해야 합니다.


의료 현장의 요구사항을 기술로 번역하여 환자 관리 효율성을 실제로 높일 수 있는 R&D 전략가가 필요합니다.


4. 경험의 세계: ‘상담 편차’에서 ‘규모의 평준화’로

한화생명 | AI 엔지니어(자연어처리)


18조 매출의 대한민국 대표 금융 플랫폼

한화생명은 보험, 자산운용, 헬스케어를 아우르는 거대 금융 기업입니다. 수천만 고객의 생애 주기를 관리하며 디지털 혁신을 주도하는 DATA LAB 조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존 서비스: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상담 품질의 한계

대형 보험사의 최대 과제는 '균질한 고객 경험'입니다. 상담원의 숙련도에 따라 응대 품질이 달라지고, 수만 건의 상담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인사이트화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고객은 기다려야 했고, 기업은 데이터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AI 전환: AICC로 완성하는 '규모의 친절'

한화생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 컨택센터(AICC: AI가 상담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지능형 콜센터)를 구축하며 고객 접점을 전면 재설계하고 있습니다.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사람이 쓰는 말과 글을 컴퓨터가 이해∙분석∙생성할 수 있게 만드는 AI 기술)를 통해 보이스봇과 챗봇이 사람처럼 대화하고, 실시간으로 상담 내용을 요약해 추천 기능을 제공합니다.


OCR(광학문자인식)과 멀티모달(Multimodal:서로 다른 형태의 데이터를 함께 이해하고 처리하는 AI 방식) 기술을 결합해 복잡한 보험 서류 처리 과정을 자동화하여 고객의 체감 대기 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이고 있습니다.


직무 핵심: 멀티모달 경험을 설계하는 금융 AI 엔지니어

이곳의 AI 엔지니어는 단순히 코딩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STT/TTS, NLU 엔진의 성능을 금융 도메인에 맞게 개선하여 상담 품질을 정량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MLOps 기반으로 모델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하며, 금융 플랫폼 전체의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 경험 설계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5. 경험의 세계: ‘규정집’에서 ‘현장용 LLM’로

새마을금고중앙회 | AI 서비스구축 개발담당


전국적 분산 조직을 가진 생활 금융의 중심

새마을금고는 지역 밀착형 금융 협동조합으로, 중앙 집중형이 아닌 전국 각지에 흩어진 현장 중심의 조직 구조를 가진 독특한 금융사입니다.


기존 업무: 분산된 조직이 겪는 정보 비대칭의 어려움

조직이 전국으로 분산되어 있다 보니, 본사의 최신 금융 정책이나 전문 지식이 현장 창구까지 실시간으로 전달되기 어려웠습니다. 현장 직원들은 복잡한 문의가 올 때마다 방대한 규정집을 뒤져야 했고, 이는 곧 고객 불편으로 이어졌습니다.


AI 전환: 현장 직원의 손에 들려주는 '금융 전문 LLM'

새마을금고는 거창한 플랫폼보다 '현장에서 바로 쓰이는 도구'로서의 AI를 택했습니다. PEFT(효율적 파인튜닝: 전체를 다시 학습하지 않고, 일부 파라미터만 조정해 적은 시간과 비용으로 성능을 맞추는 기법) 기술을 활용해 금융 데이터로 최적화된 특화 모델을 만듭니다.


직원이 "지난달 예금 추이 알려줘"라고 입력하면 AI가 즉시 SQL을 생성해 데이터를 보여주고, 복잡한 대출 서류를 검토해 주는 AI 에이전트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직무 핵심: 실질적인 효율을 만드는 서비스 구축 전문가

새마을금고의 AI 서비스 구축 담당자는 이론보다 '구현'에 강해야 합니다. RAG 아키텍처와 벡터 DB를 통해 현장 직원이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답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금융 도메인의 특수성을 AI 모델에 빠르게 이식하여 현장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현장 밀착형 개발 리더가 이 직무의 본질입니다.

6. 그룹의 세계: ‘각자도생’에서 ‘AI 거버넌스’로

CJ그룹 | 그룹사 통합 AI 기술전략


식품부터 엔터까지, 생활 문화를 선도하는 거대 그룹

CJ그룹은 제일제당, 대한통운, CJ ENM, CJ올리브영등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있는 다양한 계열사를 보유한 대기업 집단입니다.


기존 방식: 각자도생의 실험, 그리고 파편화된 기술

CJ는 AI 도입에 매우 빨랐습니다. 특히 CJ대한통운은 물류 수요 예측과 배차 최적화에서 AI로 도착 정확도를 85%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냈으며, 공차 이동거리를 줄여 연간 탄소 배출을 수백 톤 감축하고, ‘더 운반’ 플랫폼으로 화물차주 매칭 효율을 30% 이상 높인 사례도 그룹 내 확산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해당 계열사만의 전유물이었고, 그룹 전체로 보면 기술적 중복 투자와 인재의 파편화라는 숙제가 남았습니다.


AI 전환: 기술을 넘어 'AI 거버넌스'로의 통합

이제 CJ는 '각자 잘 쓰는 단계'를 넘어 '그룹 차원의 통합 관리'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CJ올리브네트웍스 내에 그룹 AI 센터를 신설한 이유입니다. 성공한 물류 AI 모델을 다른 계열사로 확산시키고, 그룹 전체의 AI 중기 로드맵을 수립합니다. C-Level 협의체를 운영하며 계열사 간 시너지를 도출하고, 외부와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그룹의 AI 체력을 총괄 관리합니다.


직무 핵심: 기술과 경영을 잇는 AI 기술전략가

이 포지션은 개발자가 아니라 전략적 조정자(Orchestrator)입니다. 그룹 전체의 AI 정책을 수립하고, 기술/마켓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투자의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계열사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AI 핵심 과제의 실행을 가속화하는 기술 전략 리더로서, AI 프로젝트 전반을 조망하는 안목이 가장 중요합니다.


7. AI 시대의 커리어: 정답이 사라진 불확실성의 시대

취업과 이직을 준비하는 이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합격하느냐"라고 묻지만, 사실 지금은 기업조차 정답을 모른 채 달리고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현장에서 목격되는 몇 가지 냉정한 현실을 전합니다.


미래를 가르쳐줄 수 없는 시대

완성된 로드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기업들이 직면한 고통의 지점입니다. 디아이티가 겪는 수율의 한계나 이지케어텍이 직면한 규제의 벽처럼, 기술이 아닌 산업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균열을 먼저 읽는 이들이 그나마 방향을 잡고 있을 뿐입니다. 안갯속에서 지도를 찾기보다, 지금 어디서 연기가 나고 있는지 현상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가치와 비용 사이의 잔인한 선택

금융권의 AI 도입 사례에서 보듯, 기업에게 AI는 혁신의 도구이기 이전에 '비용 구조의 재편'입니다. 누군가는 AI를 통해 업무 효율을 높이는 '설계자'가 되지만, 누군가는 AI로 대체되는 '절감 대상'이 됩니다. 단순히 기능을 구현하는 수준의 기술력은 가장 먼저 효율화의 대상이 될 위험이 큽니다. 기업은 이제 코딩 실력 그 자체보다, "우리의 비즈니스 비용을 AI로 어떻게 가치 있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결국 AI는 매일 문법이 바뀌는 살아있는 언어입니다. 유창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로 '어떤 산업의 문제를 풀 것인가'를 고민하는 생존 본능입니다.


8. AI 시대의 커리어 지형도: 적응∙대응∙선도의 갈림길

6개 기업이 보여준 모습은 화려한 혁신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전투'에 가깝습니다.


적응과 대응 : 디아이티, 이지케어텍, 브릭

혁신과 체감: 한화생명, 새마을금고

선도와 통합: CJ그룹


결론은 하나입니다.

AI 직무는 더 이상 IT 부서만의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산업에 있든 AI는 당신의 일을 '수동적 수행'에서 '데이터 기반의 능동적 판단'으로 재정의할 것입니다. 기업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적응하고, 대응하며, 선도하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는 지금, 당신의 커리어는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직무 경계가 무너진 이 혼돈의 시대, 승자는 가장 뛰어난 코더가 아니라 산업의 결핍(비용, 효율, 기술적 한계)을 AI의 가능성과 가장 현실적으로 연결해 내는 '커넥터(Connector)'가 될 것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일수록, 본질에 집중하십시오. 기업은 결국 자신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줄 '진짜 사람'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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