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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뚝검 Dec 21. 2021

슬기로운 검사생활

제1장  지난 8년을 기록하다

긍정꼰대(1)


    검사생활을 시작한 지 막 세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뚝 프로, 이 상해 사건 다시 한번 검토해 볼까? 수석님이 사건기록을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늦은 밤까지 몇 번이고 넘겨봤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싶은 마음에 서둘러 공소장을 읽어 내렸다. 죄명, 적용법조는 틀리지 않았다. 공소사실은 중의적인 표현 없이 깔끔했다. 오탈자도 없었고, 보강증거는 충분했다. 대체 뭐가 문제지?



피의자 최규성(가명), 특수상해죄로 형기를 살고 나온 지 세 달만에 상해죄를 저질렀어. 누범이야. 피해자는 전치 4주 비골골절상을 입었고……. 직구속 검토해 보는 건 어때?


                             * 직구속 : 검사가 경찰의 신청 없이 직접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경우를 의미하는 검찰 용어

 


    직구속이라니…….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우선 구속이 필요한 이유를 정제된 언어로 다듬어 법원에 제출할 구속영장청구서를 작성해야 한다. 혐의를 소명하는 증거들 외에 구속사유에 대한 증거들, 예컨대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지에 대한 증거들도 수집해야 한다. 게다가 직구속을 하려면 기관장 결재까지 필요한 터라 내부결재에 필요한 사건 검토보고서까지 작성해야 한다. 내 의견대로 불구속 구공판으로 처리하면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생각하니 수석님에게 묘한 반감이 생겼다.

  

                      * 불구속 구공판 : 불구속 상태인 피의자를 상대로 공소를 제기하는 경우를 의미하는 검찰 용어



수석님, 구속은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염려가 있는 때에 제한적으로 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진술이 명확하고, 상해진단서와 현장사진 같은 객관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최규성이 증거를 인멸할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뼘도 직구속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치 숙고에 숙고를 거쳐 불구속 구공판을 결정한 것처럼 꾸며말했다. 이미 산더미 같은 사건들로 매일같이 야근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든지 일이 늘어나는 불상사를 막아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거기에는 3개월이나 무탈하게 검사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잘 하고 있는데 왜 딴지를 거나 하는 거만함도 섞여 있었으리라.



그리고 최규성은 경찰에서 두 번 조사를 받았는데 두 번 다 출석했습니다. 경찰에서 합의 여부를 확인하려고 전화 했을 때에도 통화 연결이 되었고요. 도주 염려도 없어 보이는데, 구속영장을 청구할 이유가 있을까요?


    수석님은 이 녀석이 왜 이리 질색을 하며 불구속 수사를 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지, 이유를 알겠다는 표정으로 껄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커피를 한 잔 내려주며 잠깐 소파에 앉아보라는 손짓을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그럼 내가 구속이 왜 필요한지 하나씩 설명해 볼게. 뚝 프로가 내 의견이 납득 되면 직구속을 검토해 보고, 아니면 불구속 구공판으로 처리하자. 어찌 됐든 사건은 주임검사의 의견과 양심대로 처리해야 하고, 누구도 거기에 왈가왈부 할 수는 없으니까.


    떨떠름 했다. 직구속을 한다고 해서 월급을 더 받지도, 상점을 받지도 않는데 귀찮다는 생각만 들었다.불구속 구공판으로 처리하면 일 하나가 줄어드는 나도 좋고,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될 피의자도 좋은 일이 아닌가!


M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든든한 한열무 검사(백진희 분)의 지도검사, 수석검사 구동치(최진혁 분) [출처 : MBC 홈페이지]






형사소송법 제201조  제1항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제70조 제1항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을 때에는 검사는 관할지방법원 판사에게 청구하여 구속영장을 받아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고……


형사소송법 제70조 제1항

   법원은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피고인을 구속할 수 있다.

    1. 피고인이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2.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한 염려가 있는 때

    3. 피고인이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


형사소송법 제70조 제2항

    법원은 제1항의 구속 사유를 심사함에 있어서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우려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뚝 프로 말마따나 구속 사유는 증거인멸 및 도주 염려, 두 가지야. 하지만 우리 법은 구속사유를 심사하는 데에는 범죄의 중대성, 재범가능성, 피해자와 중요참고인에게 위해가능성도 반드시 살펴보도록 하고 있지.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 최규성의 범행이 얼마나 중대한지부터 볼까? 최규성은 술을 마시고 술값도 내지 않은 채 도망쳤어. 술값은 30만 원. 모텔에서 잠을 자다가 겨우 최규성을 찾아서 술값을 받으러 온 피해자가 문을 두드리니까 왜 잠을 깨우냐면서 다짜고짜 피해자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 받고, 온갖군데를 발로 밟았어. 피해자가 범행의 동기를 제공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이유 없이 피해자를 때린 거지. 나는 범죄의 동기부터 매우 불량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피해자는 코뼈가 부러졌어. 전치 4주. 상해진단서에 있는 진단명이나 진단주수만 보면 어느 정도 다쳤는지 감이 잘 안 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사진을 볼 필요가 있어. 피해자의 얼굴 사진을 보면 코가 잔뜩 부어올라 있고 인중과 앞섶에 피 딱지가 잔뜩 굳어 있잖아? 현장사진을 보면…… . 그래! 여기 현관바닥이 온통 피범벅이잖아. 피해자가 이렇게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데 이 범죄가 경미하다고 볼 수 있을까?


    수석님은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명 나도 그 사진들을 몇 번이고 들춰봤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사진들은 최규성의 상해 범죄사실을 증명하는 보강증거였을 뿐, 피해자의 부상정도를 추측하게 하는 자료는 아니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나는 피해자를 읽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수석님, 최규성은 피해자와 합의 했습니다. 합의서를 보면 피해자가 최규성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탄원하고 있고요. 상해죄는 보호법익이 신체의 완결성이라는 개인적 법익으로, 그 법익을 침해 당한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데 구속까지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맞아. 상해죄처럼 개인적 법익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범죄는 피해자의 의사가 중요하지. 그런데 꼭 피해자의 처벌 의사에 검사의 판단이 좌우될 이유는 없어.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가 아니면 더더욱 그렇고. 피고인의 범죄전력을 볼까? 피고인은 폭력 범죄전력만 29회, 교도소에 다녀온 실형 전력만 20회야. 최근 10년 동안 폭력 범죄전력은 하나, 둘, 셋……. 8번이네.


게다가 술에 취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술값을 받으러 온 사람의 코뼈를 부러뜨릴 만큼 폭행을 한 사람이라면 폭력 습벽이 있는 사람으로 봐도 무방할 거야. 언제든지 똑같은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지. 이 사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 이유로 구속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폭력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단 말이고검사가 범죄 피해자 양산을 눈 감는 꼴 아닐까?


    살면서 언쟁에서 딱히 져 본적이 없었다. 말끝을 잡든지, 꼬투리를 잡든지 하는 치사한 방법으로 억지로라로 언쟁을 버텨냈다. 그런데 요건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수석님의 말에 대꾸를 할 수 없었다. 판단에 비약이 있다거나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거리가 많아지니 싫다는 속뜻을 감추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불구속을 고집하는 나의 주장에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넘어가면 안 돼. 절대 안 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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