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면 삿포로에 가자
내가 중학생 때 엄마와 나는 약속을 했다. 겨울이 오면 눈이 펑펑 내리는 곳으로 둘이 떠나자고. 올해는 꼭, 내년에는 꼭, 이러다가 나는 기숙 학교에 갔고, 졸업을 하니 코로나가 터졌다. 현실의 저편으로 멀어진 소망이 희미해질 무렵, 나는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학을 맞이하게 됐다. 그래서 엄마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우리, 눈이 펑펑 내리는 삿포로에 가지 않을래?"
"너무 좋지!"
그렇게 착실하게 여행 준비를 했고, 아빠와 동생은 둘을 빼놓고 여행을 가는 게 야속할 만 할텐데도 모녀의 여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비행기를 끊어놓고도 워낙 바쁜 학사 일정으로 자세한 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에야 홋카이도에는 볼만한 게 뭐가 있을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행에서만큼은 느슨하게 계획을 세우는 나는 숙박, 투어 상품 정도만 예약해놓고 있다가 떠나기 하루 전에 홋카이도 여행에 관한 책을 정독하고 위시리스트를 뚝딱 만들었다.
5시 20분, 엄마의 알람 소리를 듣고 비몽사몽하며 잠에서 깼다. 오늘은 도시인 삿포로에 가는 만큼 검정색 롱 코트에 흰색 샤프카를 매치해 도회적인 느낌을 내고 싶었다. 요즘 푹 빠진 소품인 장갑도 잊지 않았다. 5시 40분, 김포 공항으로 출발했다. 언젠가 김포 공항에 가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호주 워홀을 갈 때 김포 공항에서 출발했다. 눈이 펑펑 내려 비행기가 한참 지연된 날이었는데, 그날이 이렇게 희미해지다니 시간이 빠르게 가긴 하나보다.
이번에 이용한 ANA 항공은 일본 항공사답게 서비스가 훌륭했다. 승무원도 다들 친절하고 기내식도 정말 맛있었다. 하네다 공항까지 2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비행인데도 베개, 담요, 헤드폰이 구비된 게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기분 좋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네다 공항에서 짐을 찾은 후 T3에서 T2 터미널로 이동해서 환승했다. 일찍 일어나서 피곤했는지 눈을 감았다 뜨니 비행기는 이미 하강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홋카이도는 새하얬다. 하네다 공항에 들어섰을 때는 입고 있던 옷이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더웠는데 신치토세 공항에 들어서니 탑승교에서부터 냉기가 느껴졌다. 하얗게 깔린 눈, 비행기, 그리고 옷을 벗은 나무들. 우리는 겨울의 한 가운데에 도착했다.
"눈이 내리면 좋겠어.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면 너무 낭만적일 것 같아."
엄마의 소망은 공항 리무진이 삿포로를 들어서자 이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버스 안과 밖의 온도 차 때문에 창문이 뿌얘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눈이었다. 사락사락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창틀에는 불시착한 눈송이들이 점점 쌓여갔다. 사람들은 그 정도 눈은 익숙하다는 듯 무심하게 걸어다녔다. 그리고 버스가 우리를 내려주었을 때, 우리는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기온은 낮은데 바람은 불지 않아서 그런가, 삿포로의 날씨는 살을 에는 듯이 춥지는 않았다. 맨살을 드러낸 부분은 감각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데, 한기가 옷을 뚫고 들어온다는 느낌은 없는 정도. 삿포로의 온도는 겨울을 느끼기에 적당한 온도였다.
호텔에 간단히 짐을 풀고 주변을 좀 돌아다녔다. 호텔 위치가 좋아서 홋카이도청, 시계탑, TV 타워 등과 같은 주요 관광지까지 5~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붉은 색 벽돌로 지은 근대식의 홋카이도 청사를 보고 싶었는데, 가보니 공사 중이라 천막으로 가려놓고 있었다. 어쩐지 구글에 '임시 휴업'이라고 써져 있더라니만. 아쉽긴 했지만 아쉬운대로 시계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계탑 자체도 예뻤지만 내 눈길을 더 끈 것은 시계탑 앞의 눈사람들이었다. 함박눈을 듬뿍 먹고 자라 포슬포슬하고 통통한 게 보는 사람의 입가에 미소를 띄워주었다.
삿포로는 거리마다 예뻤지만 엄마와 달리 방한 부츠를 신고 있지 않던 나는 이제 발가락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돈키호테에 들어가보니 삿포로에서밖에 신을 것 같지 않은 부츠들이 생각보다 비쌌다. 그래서 일단 가죽 부츠 안에 수면 양말을 신어보기로 했다. 확실히 나아지기는 했지만 욱신거리기까지 하는 한기를 완전히 달래기는 어려웠다. 뜨끈한 국물로 추위를 달래려고 근처의 유명한 스프카레 맛집인 'Soup Curry King'으로 들어갔다. 지하에 있었는데도 웨이팅이 지상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고민을 하다 이렇게 유명한 맛집에서 한번 먹어보자 싶어 줄을 서기로 했다. 서빙을 하시는 분이 5~10분 정도에 한 번씩 나와서 웨이팅 관리를 하셨다. 반팔을 입고도 추운 내색 하나 없던 그 분을 보며 삿포로에 살면 단련이 되는건가 서비스 정신이 대단한건가 싶었다.
스프카레는 일반적인 카레보다 묽은데, 색이나 맛이 마라탕과 약간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카레 향신료에 약간의 알싸함이 더해진 정도. 스프카레 안에는 구운 야채들이 듬뿍 들어가는데 야채 하나하나가 맛있어서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기억에 남는 것은 '오크라'라는 고추와 애호박을 섞은 것처럼 생긴 채소였는데, 얼마 전에 읽은 <경제학 레시피>에서만 들어본 오크라를 스프카레 안에서 만나니 신기했다. 나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일본과 중국 남부에서는 식재료로 흔히 쓰인다고 한다. 아무튼 오크라는 애호박같은 식감에 고추보다 좀 더 동글동글한 씨앗이 들어있었고 스프카레와 맛이 잘 어울렸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대욕탕의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엄마와 단둘이 함께하는 첫 여행, 그래서 더 소중한 홋카이도 여행의 남은 나날들을 상상하며 오늘 하루를 글로 정리했다. 조용한 방에서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경쾌하니 좋았다. 똑딱, 책상을 은은하게 비추던 간접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겨울밤처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