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추억이 깃든 곳
오겡끼데스까 - 설원에 울려 퍼지던 히로코의 외침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메아리치는 것 같은 도시, 오타루에 갔다. 오타루는 삿포로에서 JR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소도시다. 지금은 <러브레터>, <윤희에게>와 같이 영화에 나온 장소, 운하가 아름다운 관광 도시쯤으로 알려져 있을지는 몰라도 오타루는 과거 홋카이도에서 가장 먼저 개항을 한 곳 중 하나로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였다. 이제는 쇠락해 가는 지방 도시가 되어버렸지만 옛날에 은행으로 사용되었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이 과거의 영광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듯하다. 일본인들에게 오타루는 스시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바닷가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에 장인의 손길이 닿으면 그게 바로 산해진미다.
아무튼 오타루를 설명하는 다양한 말은 오타루가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라는 뜻이고, 엄마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열차에 탑승했다. 눈 덮인 홋카이도의 풍경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찬 파도가 보였다. 바다였다. 그것도 방파제에 흰 눈이 소복하게 앉은 겨울바다. 그렇게 창 밖을 한참 바라보니 오타루 역에 도착했다.
오타루 역은 우리의 예상보다 컸다. 꼭대기에 시계가 달려 있는 벽돌 건물. 2020년대의 삿포로에서 열차를 타서 1920년대의 오타루에서 내린 듯했다. 우선 짐을 맡기기 위해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아주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서 2018년부터 호텔로 문을 연 곳이었는데, 생긴 모습이 1920-30년대 부유한 금융인의 저택 같았다. 분홍빛 벽과 하늘색 문이 동화 같은 호텔이었다. 깔끔한 복도 곳곳에 그림 액자와 드라이플라워가 걸려 있어 오래된 건물 특유의 매력이 잘 살아있었다.
오타루의 중심가는 딱 하나뿐이고, 모든 관광지가 모여 있어 구경하기 쉬웠다.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호텔 주변에서는 한적한 소도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지만 중심가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가장 유명하다는 오르골당부터 들어가 보았는데, 거대한 오르골당 안에 온갖 종류의 오르골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밀조밀하고 예쁜 것이 태엽을 감아주면 아련한 노래를 부르다가 점점 느려지며 멈춰버리고 마는 게 오타루와 한편으로는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는 <윤희에게>에서 나온 쵸비차 카페에 찾아갔다. 쵸비차 카페도 오타루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한적한 분위기에서 쉬어가기 좋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영화에서 봤던 장면이 눈앞에서 재현되었다. 노란 조명이 자아내는 따스한 분위기, 조용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부지런히 그러나 바쁘지는 않게 커피를 내리는 사장 부부.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핫초코와 그라탕, 그리고 팬케이크를 시켰다. 먼저 나온 핫초코는 녹진한 초콜릿의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고, 다음으로 나온 그라탕은 펜네 파스타와 가리비를 넣어서 만들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게 너무 맛있었다. 30분이 걸려서 나온 핫케이크는 두께가 3~4cm는 될 정도로 두꺼웠는데 쿠크다스처럼 부서지는 노릇한 겉면과 따끈한 카스테라같이 촉촉한 속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쵸비차 카페는 영화와 상관없이 맛집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다!
엄마와 여행 영상을 만든다고 서로 찍어주기도 하고, 잠시 쉬면서 이야기도 하고 있었는데 창가 자리에 아들과 함께 앉아 계셨던 중년의 여성 분이 가까이 다가오셨다. 그러고선 오타루와 삿포로의 현지인 맛집을 적은 냅킨을 주셨다. 엄마와 딸이 여행 온 모습이 너무 좋아 보이셨다고.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행운 - serendipity - 가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인 듯하다. 감사한 마음에 모자의 모습을 필름 카메라에 담아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그분은 흔쾌히 응하셨다. 우리가 나갈 때 즈음, 그분은 우리의 영상을 담아 인스타그램으로 보내주시기까지 했다.
맛있는 음식도 먹었겠다, 조금 힘이 난 우리는 오타루 운하에 갔다. 오타루 운하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운하를 따라 천천히 나아가는 곤돌라는 낭만적인 정취를 더해주었다. 우리는 운하를 따라 걸었다.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고, 인적은 드물어지는 곳까지.
카페에서 만난 분이 알려주신 식당은 꽤 멀리까지 걸어야 했다. 단조롭게 직진만 하다가 빙하의 한가운데를 뚫어놓은 것처럼 양쪽에는 눈이 사람 키보다 높게 쌓여 있고 그 사이로 길이 난 곳을 발견했다. 가로등이 총총히 길을 밝혔고, 우리 외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왈츠를 추기 딱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삼각대를 세워놓고 가로등 아래서 몸이 가는 대로 왈츠를 추며 순간을 만끽했다. 나와 가장 잘 맞는 사람과 여행을 오면 이런 게 좋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이 순간순간 끌리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것, 그리고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엄마와 딸은 가장 좋은 친구라고 하나보다.
30분을 걸어 도착한 식당은 오타루의 가정집에 놀러 온 듯 시간과 함께 하나하나 늘어난 듯한 소품들로 가득했다. 외국인은 우리뿐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저녁 식사와 함께 한잔씩 하며 회포를 풀고 있었다. 남자 사장님은 친절하면서도 파이팅 넘치시는 분이라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띄워졌다. 몸을 녹일 핫와인을 먼저 주문했다. 안 그래도 취기가 빨리 도는 레드 와인을 따뜻하게 마시니 순식간에 몸에 뜨끈한 기운이 퍼지며 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역시 추위에는 알코올만 한 게 없는 것일까.
음식은 한 그릇에 7~800엔 수준으로 정말 저렴했다. 그러고 나서 나온 음식 맛은... 정성 가득한 요리를 아낌없이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야끼토리동의 닭고기는 불맛과 감칠맛이 감돌았고 콩나물 오꼬노미야끼는 콩나물의 아삭함이 가쓰오부시의 풍미와 잘 어우러졌다. 30분 동안 추운 밤길을 걸어온 후라서 그럴까, 엄마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겁지겁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사장님도, 음식도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음에 오타루에 온다면 여기를 가장 먼저 달려올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바라보는 운하의 야경은 낮과는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웠다. 가로등 불빛이 운하에 긴 물그림자를 만들었고, 불빛의 그림자는 밤바람에 일렁였다. 낭만이 가득한 오타루 운하를 따라 걷다가 마치 옛 시가지처럼 생긴 곳으로 들어섰고,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니 금세 호텔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오타루를 떠나기 전 신선한 스시를 꼭 먹어보고 싶었던 우리는 <미스터 초밥왕>에 나온 것으로 유명한 마사즈시로 향했다. 하지만 우리를 정중하게 맞아주시던 노신사 분은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앞으로 1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오후를 삿포로에서 보내고 싶었던 우리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오타루에서는 어느 스시집을 들어가더라도 웬만큼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내지 희망을 가지고. 가까우면서도 평이 괜찮고, 또 평이 너무 많지는 않아서 웨이팅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런 스시집을 찾아봤다. 그래서 당첨된 마루야마 스시.
다찌석으로 안내되어서 횟감들과 마스터가 초밥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전복들이 내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그만큼 신선한 스시를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들떴다. 일본어로 가득한 메뉴판을 파파고로 스캔하며 새삼 세상이 참 좋아졌다고 느꼈다. 이왕 오타루에 온 거 좋은 스시 먹어보기로 하고 가장 비싼 세트를 시켰다. 히토츠, 후타츠. 일본 여행에서 주문하면서 참 많이 쓴 단어인데 아직까지도 어미가 헷갈린다. 아무튼 마스터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스시를 착착 만들어나가셨다. 밥을 쥐는 손놀림이 춤추는 것처럼 경쾌해서 마스터께 영상을 찍어도 되냐고 여쭤보니 '나를?'이라고 반문하시면서 허허 웃으시곤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밥이 너무 적은 스시보다는 두툼한 횟감과 밥알이 살아있는 밥으로 입안이 차는 느낌의 스시를 좋아하는데, 마루야마 스시는 딱 내가 좋아하는 크기였다. 연노랑빛의 길쭉한 횟감이 무엇인지 여쭤보니 니신(청어)이라고 하셨다. 오독오독, 생선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식감의 회였다. 비린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싱싱한 바다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스시 하나하나가 신선하고 맛있었지만 오늘의 베스트는 우니 군함이었다. 내장류를 워낙 싫어해서 우니를 먹을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하도 맛있는데 비싸서 못 먹는다 해서 맛이 궁금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먹어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가장 비싼 메뉴에 들어있는 우니 군함을 안 먹을 수는 없어 입에 넣었다. 세상에! 내가 생각하던 비릿한 내장의 맛은 전혀 없고 치즈 같은 녹진함과 은은한 바다향이 입안을 감쌌다. 하나에 660엔이나 하는 비싼 녀석이었지만 결국 하나 더 시켜버렸다.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유쾌한 마스터가 스시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눈도 입도 즐거운 식사를 했다.
삿포로로 돌아가는 전철역에서 잠시 멈추고 오타루라는 도시를 머릿속에서 리플레이했다. 1박을 했는데도 도시가 워낙 작아서인가 이제는 구석구석 아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대의 영광을 간직한 석조 건물, 동화적인 낭만이 있는 오르골당,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래된 호텔, 한적한 골목을 밝히는 가로등, 지긋한 나이의 마스터가 만들어주는 초밥. 오타루의 다양한 모습을 봤지만, 이 모든 것은 '추억'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러브레터>, <윤희에게>와 같은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을 담은 영화들이 오타루에서 촬영되었을까? 아련한 추억에 젖어들고 싶다면 오타루에서의 하루는 어떨지.
P.S. 보통 사람들은 오타루로 당일치기 여행을 많이 오지만 한적한 소도시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1박을 하며 천천히 둘러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