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털 손질
평소라면 교대 완료하고 바로 숙소로 가서 뻗어 버릴 텐데, 그 "최대리"가 제공해 준 담요와 겉옷으로 2시부터 5시까지, 3시간의 꿀잠을 잔 덕분에 교대하고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숙소로 가는 대신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아지트로 조용하게 이동했다.
그곳은 여름 성수기에만 오픈하는 별관.
성수기 외에는 난방비 절감차원에서 정문이 잠겨 있고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인데, 후문은 열려있다. 후문으로 가는 길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길이 잘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아무도 없는 곳, 조용한 곳,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만의 아지트는 바로 그 별관의 옥상. 5층 계단을 헉헉 거리며 겨우 올라가면 탁 트인 옥상이 나온다. 별관은 산을 등지고 앞에 본관이 있는데 산속에 있다 보니 별관 옥상에서는 본관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마치 산 정상에 올라온 듯 마을도 보이고 호텔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하늘과 바람.
그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 피우는 것. 바람이 솔솔 불어와서 담배를 펴도 몸에 냄새가 배이지 않아서 좋다. 그러나 손에는 밴다. 그래서 담배는 왼손으로.
연기를 "후~~" 하고 날려 보내면 내 속의 근심들이 모두 함께 날아가는 듯한 착각이 잠시 든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 잠시 평화를 맛본다. 마지막 연기까지 날려 보내고 왼 손가락으로 담배잿을 튕기고, 남은 꽁초를 본관 쪽으로 날렸다.
그 순간 나지막이 들려온 조용한 소리. 발가락부터 없는 털이 솟아올라 순식간에 볼의 솜털까지 쭈뼛 솟구쳤다. 팔이 덜덜 떨렸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이럴 수가 나는 얼음심장인데, 얼음이 다시 얼 수가 있는 거였나?
"김주임님, 그렇게 담배꽁초 버리시면 안 되어요. 잘못하다 불나면 큰일 나요. 게다가 담배는 몸에 해로운데..."
그 "최대리"였다. 분명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문 여는 소리도, 계단을 오르는 소리도, 분명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고양이가 소리 없이 이동하잖아. 그는 혹시 고양이인가? 설마 교육담당자는 박 과장 한 명인데, 내가 박 과장이 너무 싫어서 환상의 "최대리"를 만들어 낸 건가? 내 눈앞에 이렇게 세상 순한 얼굴로 나를 연민에 가득 차 바라보는 그는 혹시 나의 환상인가? 그래 세상에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 "최대리"는 나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기왕 환상이면 직급이 더 높은 "최차장"을 만들어서 박 과장 좀 혼내 주고 그러지. 왜 직급 낮은 "최대리"로 만들어서, 내가 그렇게 박 과장에게 당할 때 옆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나미 노래 생각나는구나.)
"최대리 님, 너무 놀랬잖아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어요. 도대체 언제 오신 거세요? 그것 보다 여기는 어떻게 아신 거여요? 여기 아무도 모르는데"
나는 최대한 떨지 않고, 최대한 밝게, 그 "최대리"에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산을 향해 말을 했다.
"매번 숙소로 가시던데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시 길래, 혹시나 위험한 데 가시면 보호해드리려고 따라왔죠. 그리고 김주임님은 얼음인데 심장이 어떻게 다시 얼어요?" 라며 소리 없이 서늘하게 웃었다.
따라왔다고, 전혀 인기척이 없었는데. 나를 미행한 거구나. 그건 안 좋은 거 아닌가? 왜 내가 위험에 처하지? 여기는 호텔이고 직원들도 많은데, 그리고 왜 나를 구해주려 하는 걸까? 우리나라에는 엄연히 경찰이 있는데, 경찰이 나를 구해줄 텐데, 왜 경찰이 아닌 '이 남자'가 나를 구하려는 거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그냥 원래 이렇게 정 많고 친절한 사람인 건가? 아닌가 고양이 인가? 혼란스럽다. 무언가 화제를 돌리고 싶다.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이야깃거리가 생각나지 않아서 아무 말이나 뱉었다. 궁금하지 않았는데, 마침 "최대리"의 손에 들린 책이 눈에 들어와서.
"이거 사실은 김주임님 선물로 드리려고, 그런데 혹시 싫어하실 까봐, 계속 고민하느라.. 사실 저 이거 한 달째 들고 있었어요. 김주임님 괜찮으시면 선물하고 싶어요."라고 내민 책은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이었다.
선물을 주면서 그는 무척이나 당황해했다. 그는 늘 말이 없고 그저 조용히 내 앞에 서서 미소만 짓는 스타일이었는데, 이 책을 선물하는 그는 무어라고 중얼중얼 이어지지 않는 말들을 계속 나열했다. 그가 하는 말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책을 훑어 보았다.
"책 좋네요. 감사합니다. 마음에 들어요. 저 교대 마치고 가끔 할 일 없을 때 있었는데, 이 책 꼼꼼하게 읽어 볼게요. 지금 대강 보기에는 상대방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고 상대방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내용 같네요."
갑자기 그 "최대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평소의 작고 조용한 목소리와 달리 들뜬 목소리로 외치듯이 말했다. "맞아요.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칭찬 많이 해주고 그러면 정말 대인관계가 엄청 달라지거든요. 김주임님이 읽으시면 정말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을 하다가 순간 아차 싶었나 보다. 말을 끝내고는 내 표정을 살핀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다시 불안해하며 주절주절 횡설수설 이어지지 않는 말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앗, 그게 김주임님이 사람들 말을 잘 안 듣는다 는 게 아니고요, 그 뭐, 그 사람들이 주임님을 얼음이라고 부르는 거는, 그 김주임님을 잘 몰라서, 그러니까"
알고 있었다. 직장 동료들이 나를 <얼음> 혹은 <냉동>이라고 부른다는 거.
나는 '이중 인격자'처럼 돈 앞에서만 미소 짓고, 친절한 가식덩어리 목소리 였다. 그건 내 본래 모습이 아니고, 그 연기를 하기 위해 너무 애쓰다 보니, 그 상황이 종료되고 나면 본래의 나보다 더 차가워지고 날카로워졌다. 가시 돋친 말로 동료들에게 상처를 줬고, 그들이 받는 상처에 관심이 없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사실 진짜 얼음심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험담 하는 거 별로 상처받지 않아요. 최대리 님이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책 감사해요. 잘 읽고 돌려 드릴게요."
왜 그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처럼 보였을까? 아침 햇살이 살짝 안경에 부딪쳐 반짝인 것뿐일 텐데, 그런데 나는 문득 그를 살짝 안아 보고 싶었다. 왜 그는 내가 사람들과 잘 지내기를 바라는 걸까? 도대체 왜 그는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안쓰러워하는 걸까? 도대체 왜? 왜 나를 보호해 주고 싶어 하는 거지? 나는 왜 자꾸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