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부탁해

열 살 이예지 양

by 이승환

어찌 채울수록 먹을 게 없다. 그냥 '냉장고 역설'이라고 하자. 물론 이 부조리는 냉장고 잘못이 아니다. 적당히 재료를 구입해서 제때 요리하고 제대로 먹는다면 냉장고 크기는 지금보다 절반 크기여도 충분할 것이다. 알면서 그러지 못하는 게 일상이 고단한 이유고. 여기까지가 갑자기 냉장고 채소를 모두 꺼내 라면봉투 옆에 늘어놓은 가정사적 배경이다. 점심 메뉴를 확인한 너는 부르기도 전에 식탁에 앉았다.


살릴 것만 살리고 어중간하거나 못 쓸 것은 버렸다. 먼저 끓는 물에 아낌없이 무를 썰어 넣었다. 한참 끓이다가 양파와 애호박, 피망도 썰어 넣었다. 라면에 기본으로 포함된 마법가루가 있어 계량도 요령도 없는 재료 투입이 두렵지 않았다. 면을 넣기도 전에 깊은 맛이 코를 찌르다 못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조리 종료를 알리는 종만 있었다면 더 그럴듯했겠다.


"아빠, 국물이 진짜 깊고 맛있어요."


네 감상이 깊고 맛깔나구나. 앞으로 내민 엄지는 그대로 도장이 돼 마음에 찍혔다. 다시 강조하지만 냉장고는 채울수록 먹을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잘 먹으면 채울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