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신저클레어 Dec 03. 2023

목표지향적 인간의 데이트

신랑아 미안해

신랑이 열흘간의 휴가를 받았다.

보통 다른 사람들 대부분 해외여행을 간다는 그 리프레쉬 휴가다.

아쉽게도 해외여행 계획은 무산되었고 국내 여행이라도 즐기자며 일정을 조율해 봤는데...

세상에, 나의 크고 작은 일정 때문에 오직 하루만 함께 놀 수 있었다.


미안했지만 하루가 어디냐며 그 하루만큼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겠다고 생색을 한껏 냈다.

신랑의 선택은....

춘천 케이블카 타기?!


(미안..) 출발 전부터 깊은숨을 몰아 쉬었다.

춘천까지 가야 하는 거였어?

신나며 출발하는 신랑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러나 나도 모르게 1시간 반을 푹 자버렸다.

케이블카 매표소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몇 분 걸리지?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오나?'였다.


게다가 바람이 씽씽 부는 매우 추운 날이었다.

추위를 아주 싫어하는 나로서는 케이블카를 내려 삼악산 정상까지 또 15분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 어떤 돌덩이보다도 내 맘을 무겁게 짓누르더라.


그래도 케이블카를 타고 잔잔한 음악소리를 들으며 유유히 흐르는 물을 아래로 내려다보니 조금은 여행 온 기분이 들며 귀차니즘으로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케이블카 탑승 시간이 길었다.

한 15분 정도 탄 것 같다.

체력 비축과 동시에 약간의 힐링을 경험한 나는 내리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 추월하며 경보하듯 걸었다.

그래야 추위를 덜 느끼니까...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남들보다 숨이 가빠서 유독 나만 쌕쌕거렸다.

숨이 안정되고 그제야 경관을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흘렀다.

하.. 내가 오르면서 이걸 안 보고 걸었구나!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빠른 걸음들이 되려 충격이었다.



아내의 소임을 다 하기 위한 하루코스 여행이었지만 덕분에 2023년이 가기 전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동시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천천히 쉬엄쉬엄 올랐는지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원래 그렇다.

신랑은 걸어가면서도 "저 사람 봤어?"라고 묻지만 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오직 가는 방향과 나의 발밑에만 시선을 둔다.


천천히 사진 찍으며 올라오는 신랑에게 왜 자꾸 늦냐고 물을 여유도 없이 혼자 헐떡이며 올라온 것이 이제 좀 안쓰럽고 웃기다.

효율과 가성비를 외치며 목표지향적인 삶을 추구해 온 내 방식이 되돌아보니 빨리 이룰 수 있을지언정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자연이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멍하게 자연과 대화하고 있는데 신랑이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르더라.

그래.. 열일해야지.

발 표시 있는 곳에 서 있는 신랑을 모델 삼아 사진 몇 장 찍어주고 이번에는 좀 느지막이 내려왔다.

몰랐는데 내려오는 길에 발 표시가 꽤 있더라.

포토존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사진 찍을만한 곳이 많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다 누리며 내려왔다.


"신랑아, 나 오늘 열일했지?"

"무슨 열일?"

"여기까지 같이 와서 사진도 찍어줬잖아."

"...... (얘 뭐지? 표정)..."


소중한 하루를 함께 했다는 말을 굳이 한다는 게 무슨 임원 의전하며 하기 싫은 새벽 등산한 직원처럼 표현해 버린 T 아줌마...

만회하려는 순간 신랑의 한마디!


"자, 이제 그리스로 갑니다~"

"무슨 말?"

"레이디 앤 젠틀맨, 블라블라....(기장처럼)"

"헐.... 야근 수당 주나요?!"


둘이 한껏 웃었다.

그만 집에 가고 싶었지만 끝까지 열일해 보자는 마음으로 간 신랑의 픽 산토리니 카페..

그런데 안 갔으면 큰일 날 뻔 한 곳이었다.



목적지향적인 아내를 둔 신랑에게 조금은 미안한 여행이었다.

종일 지친 표정으로 숙제하듯 다닌 것 같아서 말이다..


여유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가는 기회를 줘도 그게 기회인지도 모른 채 밋밋하게만 나이 드는 건 아닐까.

나 같은 사람에게 때로는 의도적인 브레이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랑은 그걸 휴가 기간 동안 매일 느꼈는지도...


m.Claire.



작가의 이전글 넘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맛깔나는 여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