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소설
나는 오래된 야구팬이다. 서울이 고향인 탓에 어린 시절 MBC 청룡(현 LG 트윈스의 전신인 프로야구단)의 어린이 회원 야구 점퍼 한번 입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려면 꽤나 부담스러운 가입비를 내야 했고, 우리 집 경제 사정이 생각보다 좋이 못했는지, 나에게 커다란 용 한 마리(MBC 청룡의 마스코트)가 새겨진 파란색 야구 점퍼는 요원한 얘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동네에서 야구 점퍼를 입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글러브나 야구방망이를 들고 다니는 친구나 형들을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야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꽤나 수준이 높은 경기? 였는데, 무려 중학생 야구부 형이 상대편 투수로 등장한 경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전문 선수인데 글러브 하나 제대로 없는 동네 애들 야구에 투수로 등장하여 의기양양하게 삼진을 잡아대며 빠른 공으로 아이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온 나의 타석! 관중 한 명 없는 경기인데 왜 이리 떨리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야구부 형이 던지는 공은 공포에 가까울 만큼 빨랐는데, 내 앞에 나온 야구 꽤나 한다는 동네 애들도 연신 삼진을 당한 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거의 눈을 감고 쳤던 것 같다. 그런데 뭔가 내 방망이에 묵직하게 맞아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천운으로 내가 냅다 휘두른 방망이에 공이 얻어걸린 것이다. 공을 맞추었다고 생각하니, 나의 시선은 오로지 1루 베이스 밖에 보이지 않았고 나는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1루에 도착해 있었고, 난 생애 첫 안타를 치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중학생 선수에게!
그리고 지금 비록 야구선수가 되진 않았지만, 그때의 강렬한 기억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내가 오랜 야구팬으로 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10승 투수가 되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마운드에 올라야 한다.
컨디션이 좋은 날도 나쁜 날도 묵묵히 공을 뿌려야 하고,
팀이 지든 이기든 또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
<야구 해설가 하일성>
야구를 조금 아시는 분들은 '10승 투수'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프로야구는 보통 4월에 시작하여 10월까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같이 경기를 하는데, 한 팀의 선발 투수를 맡아 한 시즌 동안 10승 이상을 거둔다는 것은 그 팀의 주축 투수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증표이다. 선수들 간의 경쟁이 워낙 치열한지라 프로야구팀의 1군 선수가 된다는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인 데다가, 그 팀의 선발투수로 활약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선수 자신에게도 명예이다. 그러나 선발투수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한 시즌동안 10승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둔다면, 자신을 믿어준 팀에게도 고개를 들 수 없을뿐더러, 다음 해에 또다시 선발투수로 활약하리라는 보장은 멀어진다.
그만큼 선발투수에게 10승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자신에게 주어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으며, 팀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최소여건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몇 년씩 10승 이상을 연속적으로 올리는 선수라면 팀을 책임지는 주축으로 인정받는다. 비록 훨씬 더 많은 승수를 올려 그해의 최다승 투수가 되고 화려한 영예를 얻는 선수들도 있겠지만, 매해 꾸준히 10승 투수가 된다는 것은 야구선수로서 성실성과 꾸준함을 인정받는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프로야구 해설자 하일성 씨는 생전에 10승 투수의 요건에 관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셨다. 오랜 해설경험과 야구에 대한 애정으로 쌓인 안목이 녹아든 말인데, 우리의 삶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승 투수가 되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마운드에 올라야 한다. 오늘은 비가 오니 공을 던지기 어려울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준비를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경기가 공식적으로 취소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워밍업 하며 투수판에 오를 그 순간만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은 날 뿐 만 아니라 나쁜 날도 공을 던져야 한다. 팀이 나를 믿고 맡겨준 역할이기에, 비록 엉망인 컨디션 때문에 안타를 한두 개 더 얻어맞는다 하더라도, 꾸역꾸역 점수를 막아가며 선발투수로서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기를 지는 날이다. 자신은 잘 던졌지만 뒤에 받쳐주는 선수들이 잘못하여 경기를 질 수도 있고 너무나 잘 던졌지만 운이 지독히 따르지 않는 경기도 있다. 그러나 최대한 빨리 잊어야 한다. 이길 때도 질 때도 그 기쁨이나 실망은 잠시뿐 또다시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
나는 겸손하지만 노련한 10승 투수가 되어 벤치에서 몸을 풀고,
마운드에 올라 숨을 고른다.
신중히 포수와 사인을 나누고,
홈런타자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서서히 와인드업, 온 힘을 다해 볼을 뿌린다.
공이 내 손을 떠나는 순간, 나는 진정 자유로워진다.
배트는 허공을 가르고 주심의 손이 번쩍 들려지자,
터질 듯 함성 소리가 가까워 온다.
나는 아랑곳 않고 침착히 2구를 준비한다.
<어느 10승 투수가>
10승 투수가 되었다고 선수생활의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니다. 일정 목표를 이루었다고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겸손하고 노련한 10승 투수는 공 하나의 승리에도, 관중의 터질 듯한 함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공을 준비한다. 닥쳐오는 매 순간에 집중하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진심은 그 어떤 투수의 화려한 기술보다 강력한 힘이 되어 또다시 10승 투수를 가능케 한다.
현대인들은 점차 성실함 보다는 영민함과 천재성을 선호하고, 노력보다는 기회를 잘 포착하는 센스를 의지하는 경향이 늘어만 가는 것 같다. 급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의 득실만을 따진다면 누구도 거부하기 쉽지 않은 방향일 것이다. 그러나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아직도 성실함과 노력의 가치는 여러 곳에 살아 있다. 우리가 성실과 노력을 대하는 방법은 달라지겠지만, 그 가치는 영원히 달라지지 않고 인류의 역사 속에 흘러갈 것이다.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어려울까? 아니면 평생을 겸손함과 꾸준함 속에 매번 팀에 도움이 되는 10승 투수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려울까? 물론 둘 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둘 다 나름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와 꾸준함의 자리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최고는 한 명이지만, 꾸준함의 자리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꾸준함의 자리는 노련한 10승 투수와 같은 겸손함과 진정성이 있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속적으로 10승 이상을 하는 투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최고의 화려함은 아니지만 나의 삶에 연결되고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