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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다 Jul 04. 2021

주기도문

서른다섯 이모

막내 이모는 빼어난 미인이었다.

어린 내가 봐도 막내 이모가 이모들 중에 제일 예뻤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씨도 제일 고왔다.

명절 음식을 많이 먹어 체해서 드러누워있던 나에게 막내 이모만이 와서 괜찮냐고 이마를 쓸어줬었는데 내가 아직도 그 걱정 어린 눈짓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은 진심을 어른들보다 잘 가려낸다.

마음도 얼굴도 예쁜 막내 이모

이모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나랑 나이는 같지만 먼저 태어나서 언니라는데

나랑 나이도 같은 애를 언니라고 부르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 애를 무엇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일 년에 설 때 딱 한번 외갓집에 갔다. 우리와 달리 서울에 사는 나머지 가족들끼리는 자주 왕래가 있던 탓에 우리만 어색함을 느꼈다.

아니 나만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

그날은 내가 열한 살이 되는 설이었다.

서울깍쟁이 계집애들이 세명, 그리고 촌년인 나와 내 남동생

걔들은 저마다 가져온 물건을 자랑하기도 하고

일상적인 학교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내 눈엔

꼭 깍쟁이 티를 내는 것 같아서 제법 눈꼴사납게

보였다.

딱히 자랑할 것이 없던 나는 이모들이 저녁상 차리는 것을 나름대로 묵묵히 도우며 '역시 의젓하다'는 말을 들을 때 걔들과 다른 어른스러운 아이인 양

우쭐해하며 내 마음을 달랬다.

막내 이모 딸은 다이어리를 가져와서 자랑했는데

한편으로는 의젓한 행세는 집어치우고 나도 그 사이에 끼여 들여다보고 싶었다.

얼핏 보니 예쁜 속지들을 골라서 끼워두고 알록달록한 스티커도 보인 것 같았다.

나에게도 저런 다이어리가 있었다면.

나도 저런 다이어리를 챙겨 와서 세련되게 소개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

막내 이모 딸이 대장 노릇을 하며 나만 빼고 사촌

동생들과 내동생까지 챙겨서 우르르 슈퍼에 갔다.

어른들 몇만 남은 조용한 외갓집

어른들은 주방 쪽에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할아버지는 안방에 앉아서 뉴스를 보고 계셨다.

나는 두리번거리다 '언니'의 다이어리를 손에 집어 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시 내려놓을까 하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건넛방에 걸려있는 내 코트 주머니에 재빠르게 그 다이어리를 쑤셔 넣었다.

숨이 가쁘고 뭔가 대단히 괴로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미 내 코트 주머니에 들어가 버린 다이어리를 다시 꺼낼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때부터 다른 가족들이 각자의 집으로 다 돌아갈 때까지 나의 기억은 희미하다.

그 애가 다이어리가 어디 갔나 하고 찾았는지,

찾다가 에이 모르겠다 하고 집에 갔는지,

어쩌면 내 코트 주머니에 있다는 걸 알고 마음씨

착한 막내 이모가 눈감아 주자며 딸에게 윙크를

살짝 했는지,

어땠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나는 귀를 닫고 내 코트 주변에 가만히 앉아서

내 잘못이 드러나지 않도록 보초를 서고 있었다.

-

집에 돌아오며 조용히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내 것이 아닌 낯선 다이어리 표지가 만져졌다.

내 손은 그것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내내 주머니에 넣지 못하고 꺼내어 둔 채 집에 왔다.

집에 돌아와서 문을 잠그고 주머니 속 다이어리를 꺼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모 딸 손에 있던 것을

내 방 책상에 올려놓고 보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약간의 용기를 내어 다이어리를 열었다.

표지를 열자마자 작게 사진을 넣어두는 칸에 이모와 딸이 활짝 웃는 사진이 꽂혀있었다.

"너는 누구니? 왜 네가 이 사진을 갖고 있는 거야?"라고 사진 속 이모가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무섭고 괴로웠다.

그것을 더 뒤적이지 않고 그대로 접어서 서랍 제일 안쪽에 넣어두었다.

막내 이모와 열두 살 설은 함께 지내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 해에 이모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도 짙은 슬픔과 죄책감이 그림자처럼 매달렸다.

-

이모가 입원해있는 동안 한번 이모를 보러 갔었다.

병실에 누워있던 이모의 앙상한 종아리를 만졌다.

어린 나의 손에도 쏙 들어올 만큼 얄따란 정강이

뼈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이모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판기 음료수를 사 먹으라고 이천 원을

주셨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이모의 마지막 모습이다.

-

그때 우리 가족을 포함한 외가 식구들이 성당에 꽤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이모의 장례를 천주교 미사식으로 치르고 돌아왔다.

나는 그 주에 성당에 가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고해소에서 내 죄를 고백했다.

'언니 다이어리를 훔쳤어요.'

신부님은 그래도 용기 내어 고백한 것에 대해 격려해주시며 주기도문을 다섯 번 드리라고 했다.

나는 텅 빈 성당의 긴 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으니 막내 이모의 얄따란 종아리와 이모

딸이 생각났다.

그러다 나의 부들거리던 손과 철없던 질투를

생각하고 세상에 딱 한 장뿐일 그 작은 사진이 내

서랍에 있는 것을 원망하며 울면서 다섯 번 주기도문을 읊었다.

혹시 이모 딸이 죽은 엄마를 추억할 때 꼭 그 사진을 찾으면 어쩌지,

그 사진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으면 어쩌지.

하며 다섯 번의 주기도문으로 용기 없는 용서를

구했다.

어느덧 나는 그때의 이모 나이가 되었지만 그 날이 스스로에게도 용서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그리고 그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는,

슬프고 추악하게도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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